약(藥) 1. 모자라선 안되게, 과해서는 더욱 안되게.
내가 가진 병이 늘어나고 병이 희귀해질수록 먹어야 하는 약의 수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첫 번째 희귀 난치질환인 베체트는 '류머티즘 내과'에서 진료한다.
-가장 고질(痼疾)인 혈관성 두통은 '뇌신경과'에서 진료를 보고 있다.
-두 번째 희귀 난치질환인 CRPS는 '마취통증 의학과'에서 진료를 본다.
-베체트 때부터 시작됐던 섬유근육통도 '마취 통증과 의학과'와 '정신과' 두 군데서 진료를 보고 있다.
-우울증과 불면증, 불안증과 공황 장애는 '정신과'에서 진료를 보고 정신과 교수님이 전반적인 약물에 대한 상담을 주관하며 약을 조절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자율신경 실조증은 '뇌신경과'와 '마취통증 의학과'에서 함께 협진한다.
-역류성 식도염과 위경련, 계속되는 위염은 '소화기 내과'에서 진료를 본다.
-오랜 약 섭취와 불규칙한 식사로 간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나빠져 '내분비 내과'에서 진료를 보고 있다.
내가 두 번째 불치병을 선고받았을 때 병원에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앓고 있는 병이 차고 넘쳐 힘들었는데 거기에다 남들은 평생 걸릴지 말지 들어보지도 못한 병이 내게 찾아왔기 때문이었다. 약을 처방하는데 각 과에서 서로 자기 과의 약은 반드시 먹어야 한다며 불협화음이 있었고 실제로 겹치게 처방되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났다.
어떤 약을 빼고 어떤 약을 먹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일 년에 많으면 4~6번 입원을 했는데 입원시킨 과에선 어떤 약을 꼭 써야 한다 얘기하고, 또 다른 과에선 그 약을 투약하는 것에 반대 의사를 내 비쳐 환자를 가운데 두고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된 적도 있다. (절대 저에게 해가 되게 한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특별한 케이스였기 때문에 시간이 좀 필요했었죠.)
모두 다 내가 조금이라도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이 앞서서 그랬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나였지만 저간의 사정을 알고 있다 해도 힘들고 고통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은 처음의 황망했던 시간은 어느 정도 지났고 또 내가 병원 내의 유일한 케이스 인 데다 자살시도까지 했던 전적 때문에 모두 유기적인 협조 아래 마치 한 몸이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처럼 도움을 주려고 애쓰고 있다.
그리고 약 또한 가능한 내 컨디션에 맞도록 최선을 다해 나에게 맞는 약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두통과 베체트만 있을 때에도 맑은 정신으로 있어 본 날이 몇 날인지 손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항상 심한 두통에 시달려 왔다.
베체트는 구내염과 관절염, 그리고 여러 가지 염증들로 항상 몸에 미열을 안고 살아 가게 만든다.
입 안이 구내염으로 10여 곳 이상씩 심하게 헐어 물 한 모금 삼키는 것이 고문과도 같은 날들의 연속이다.
예민해지지 않으려고, 아이에게 짜증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아서 죽을힘을 다해야 한다.
그렇게 견디려면 내게 약은 절대로 없어선 안 되는 필요 불가결(必要不可缺)한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 CRPS라는 병이 더해지고 섬유근육통과 자율신경 실조증이 더해지면서 몸은 더 이상 내 정신이나 마음의 지배를 한참 벗어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예민해지지 않고, 웃으며, 고통을 감추는 것이 그저 사치에 불과한 일이 돼버리고 말았다.
오래되고 심한 병을 앓는 대부분의 환자들이 겪는 과정 이겠지만 처음엔 삼시 세끼에 챙겨 먹는 수많은 약을 제외하고도 내가 스스로 먹을 수 있는 독한 약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금세 그 약들이 별 소용이 없어진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너무 심한 통증에 짓눌려 잠시라도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어리석은 생각에 독한 약들을 처방된 양보다 많이 먹고 몽롱한 상태에 빠져 있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하지만 살이 타고 뼈가 부서지는 듯한 지독한 통증이 찾아오면 아무리 많은 약을 집어삼켜도 극명한 통증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론 약을 처방된 이상으로 먹고 현실을 도피하려 하는 어리석은 행동은 멈추게 됐다. 다행히도.
하지만 한동안 이어졌던 어리석은 행동으로 큰 후유증을 안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많은 약의 양으로 편치 않던 위와 장이 제대로 고장 나 오랫동안 고생을 하게 됐다.
내게 맞는 약, 적당한 양, 투약시기 등을 맞추느라 여러 번 입, 퇴원을 반복해야 했고 잘 맞는다 생각했던 약도 다른 과의 약과 반응이 좋지 않아 결과가 좋지 않았던 적도 비일비재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한때는 내가 견딜 수만 있다면 약을 줄이는 게 좋은 게 아닌가라고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