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누 빚던 여자
비누를 만들지 않은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비누 만들기가 일상이었던 때도 있었는데 말이다.
그러다 비누베이스를 자르고 녹여서 다시 모양을 만드는 그 과정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때가 있었다.
그때 부터는 ‘자연에서 온 재료로만 빚어서 만들자.' 하고는
옥수수전분과 SCI(코코넛유래)가루만 넣어 빚어내는 방식으로 비누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부다비에 오고서는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비누.
바르셀로나에 다녀오며 사온 록시땅 비누. 손님과 함께 쓴 그 비누가 이제 다 닳아 없어졌다.
최근 들어 촉감과 향이 가장 멋졌던 비누였다. 물론 재료도.
비누 빚던 시절이 떠올랐다.
혼자서 만들기보다는 늘 아이들과 이웃들과 함께 했다.
투박하고 그저 그런 비누를 좋아해 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나도 그 돌멩이 모양 같은 울퉁불퉁한 비누가 좋았다.
비누 하나만 놓고도 많은 이야기를 풀어낼 수가 있을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비누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에 더해 비누와 함께 한 사람들을 사랑했다.
비누하나 쥐어주며 작별했던 한국 친구들이 떠오른다.
나에게 비누는, 씻는다는 행위는 그저 관념적인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향과 촉감과 기억을 연결시켜 주는 도구로서의 비누. 아마도 글을 통해 내 이야기들을 쏟아낼 수 있겠다.
프랑스의 작가 프랑시즈 퐁주는 자신의 책 <비누>에서 이렇게 말한다.
자연에는 비누와 견줄만한 것이 없다. 그렇게 소박하면서도 멋진 돌은 없다.
비누의 인격에는 진실로 매력적인 뭔가가 있다.
그의 태도는 흉내 낼 수 없다.
그는 비누를 조약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인격이라는 표현을 하며 비누를 의인화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비누만큼 나와 가까운 친구가 또 있을까?
비누만큼 나를 많이 쓰다듬은 존재가 또 있을까?
향내로 촉감으로 위로를 주는 비누라는 도구. 아니 인격.
그의 돌봄으로 내가 이렇게 잘 버텨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문득 지난날에 내가 비누를 빚던 장면이 떠오른다. 점토를 주무르듯 주무르고 둥근 조약돌처럼 빚어낸 라벤더 향 가득했던 그 비누가 그립다.
지금은 몸과 마음이 조금 지친 상태여서 빚는 사람으로 지내기가 힘들다.
대신 아부다비의 보랏빛 비누가 매일 아침저녁 내 손과 발, 온몸을 쓰다듬으며 위로의 말을 건넨다.
“나를 빚어 주어 고마웠어. 조금 쉬어도 돼.“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