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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준돌 기자 Jan 11. 2022

술자리에서 뒷담

그곳은 참, 남 말하기 좋은 곳

술자리는 사람을 느슨하게 만든다. 그래서인지 술자리에서 안줏거리로 삼는 것 중 하나는 뒷담, 남말이다. 뒷담이 안줏거리라는 말은 괜한 게 아니다. 상대와 서먹하면 서먹할수록 사람들은 쓸데없는 뒷담을 한다. 대화의 공백을 마땅히 채울처리가 없기 때문이다. 혹은 적당히 친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화풀이식 뒷담을 하기도 한다. 놀랍게도 그런 뒷담을 하면 다음날이나 다다음날쯤이면 당사자가 알게 된다. 나에겐 술자리 뒷담에 관한 기억 남는 에피소드 두 가지가 있다. 완전 상반된 상황이다.


뒷담 안 할거야, 앞담도 할거야

사람을 완전히 못 믿게 된 건 술자리에서였다. 물론 시간이 꽤 오래 흐른 일이다. 아마 당사자는 기억을 못할 것이다. 그 선배는 참 유명했다. 그가 유명했던 이유는, 바로 후배 뒷담을 잘 한다고 소문이 나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사람은 겪어봐야 알고, 그 선배가 뒷담을 할 리는 없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어리석었다.

뒷담을 자주하는 사람에게 뒷담이라는 건 그렇게 죄책감 있는 행동은 아니다. 안줏거리처럼 튀어나와서 그날 술자리에서 소비해버리는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뒷담이면 상관없지, 문제는 앞담도 서슴없이 한다는 거였다.

언젠가 내가 생각하는 중요한 사람(VIP)이, 선배와 오랜 시간 아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어서 술자리를 가졌다. 선배가 팍팍 밀어준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데려갔다. 한 두잔 술이 들어가고 거나하게 취하면서 선배는 갑자기 남의 뒷담을 하기 시작했다. VIP와 연관성 있는 모든 이의 뒷담을 늘어놓았다. 시간이 흘러 뒷담거리가 떨어지자 이제 타깃은 나로 변경됐다. 눈 앞에서 나의 작은 흠결들을 VIP에게 풀어놓았다. 구체적으론 말할 수 없지만 예를 들면, 내가 기차표 끊는 법도 모르더라 수준의 내가 촌 사람인 것 같은 이야기, 내가 어느 날은 이런 실수를 했다 식의 이야기. 그 사람에게 굳이 할 필요 없는 나의 치부를 하나하나 벗겨 드러내놓고 전시하기 시작했다.

그때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그 선배의 눈이 내가 아니라 VIP의 웃음에 향해있다는 거였다. 나를 싫어해서, 내 실수를 깊이 생각해서도 아니고 그저 VIP와의 술자리를 화목하게 만들기 위해서 나를 이용하고 있었다. "하하 진짜요?"라고 말하는 VIP의 호응을 듣고자 내가 지난날 했던 사소한 실수들이 마음껏 펼쳐지고 과장되어 꺼내지고 있었다. "아니 선배 그건 그 정도 일이 아니잖아요 하하" 나도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 웃으며(?) 말려 보았지만, "그래~ 조미료 좀 쳤지, 넌 눈치가 없냐"의 타박이 돌아왔다.

거기서 나는 어떻게 대처했어야 할까. 당시에는 '그래, 선배가 자리를 편안하게 만들려고 했나보다' 했지만, 알 수 없는 수치심이 온 몸을 휘감았다. 그뒤로 나는 누군가를 웃기기 위해 남을 까대는 행동을 하면 흠칫 하면서 멈추곤 한다.

 

뒷담하지마

반면 내가 존경하는 모 선배는, 괜한 것 때문에 존경심이 생긴 게 아니었다. 바로 뒷담을 대하는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 바쁜 하루를 마치면 온 종일 불만이 생기길 마련이었다. 그건 나 뿐만이 선배들도 마찬가지였다. 부당한 지시를 받기도 하고, 이상한 요구에 응하느라 기진맥진한 하루가 되면 선배들이 꼭 맥주 한 잔을 하자고 불렀다. 맥주를 짠 하고 부딪히는 것과 동시에 그날의 뒷담이 시작됐다. 이것은 그 사람이 잘못했다, 얘는 왜 이러냐 등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 마치 의례와 같았다. 그리고 나는, 그게 어쩌면 사회생활에선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이런 생각의 고리를 끊어준 한 선배가 있었다. 여느 때처럼 맥주잔을 짠-부딪히고 한 선배가 뒷담을 시작하려는 찰나, "우리 오늘 그런 이야기는 그만하자"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그는 마시고 먹기만 했다. 뒷담을 꺼내려는 선배는 약간 머쓱해했지만, 이내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뒷담 없는 술 자리였다. 그리고 늘 그 선배와 술자리를 하면 그는 약속이라도 받듯 "오늘은 우리 즐거운 이야기만 하자" 등의 운을 먼저 떼서 아무도 뒷담을 못 하게 만들었다.

그게 마지막 경험이었다. 술자리에서 뒷담을 못 하게 막아주는 것. 선을 정해주는 행동. 나도 나중엔 그 선배를 따라서 몇 번 해본 적이 있었지만, 쉽지 않았다. 일을 하다보면 억울한 일도 생기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순간도 생기는 걸. 다만 뒷담이 나오려고 하면 습관처럼 그 선배의 얼굴이 떠오른다. 우리 오늘은 우리 이야기만 하자, 라고 달래듯 말해주던 선배의 모습. 아마 가끔은 입이 근질거려도 "오늘은 우리 이야기만 하자"의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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