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삼척하프코스 구경하며 달려보기
" 아니 어쩌다 달리기를 하셨어요?"
" 그러게 말입니다. 허허"
한때는 달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더운 날, 왜 굳이 뛰지? 생각만 해도 손을 휘휘 저어버렸던 나였다.
달리기는 내가 좋아할 일이 아니라는, 아주 확고한 선입견을 갖고 있었고, 그저 달리는 사람들은 나와는 다른 영역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여전히 그런 생각은 갖고 있다.)
흥미 없는 일엔 사람들은 그리고 나도 역시 괜히 방어적으로 굴게 된다.
모르니까, 몰라서 멀리하게 되고, 멀리하다 보면 괜히 비판하게 된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가장 큰 변화는 늘, 내가 관심 없던 일에서 시작되었던 것들이 많다.
" 풀코스를 어떻게 뛰세요?? 정말 대단하세요! 저는 거기까지는 못 갈 것 같습니다. "
"풀코스 뛰는 사람들도 1km부터 시작한 사람들이에요. 처음부터 풀코스를 뛰진 않죠."
요즘 내가 좋아하는 말이 생각난다.
조급함보다는 각자의 속도와 리듬을 인정하는 따뜻한 말인 것 같다.
마라톤이든 인생이든, 한 걸음씩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스스로도 놀랄 만큼 멀리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처음부터 풀코스를 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1km, 3km, 5km… 그 작은 걸음들이 쌓여 어느 순간 ‘풀코스’라는 꿈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거겠지.
그러니 지금의 "나는 아직 거기까지는 못 가요"라는 말도 결국 "언젠가는 갈 수 있어요"라는 희망의 다른 표현이라 생각한다. 여전히 의심을 품은 채... 풀코스를 사람이 뛸 수 있는 거리란 말인가....
나의 귀여운 일탈 2화는 마라톤을 하며 낯선 동네 구경하기이다.
10km 달리기 출전이었다면 앞만 보고 기록을 생각했을 텐데, 내 생애 첫 하프는 기록보다 그저 완주만이 목표였기에 욕심을 전혀 부리지 않은 마실 달리기였다.
눈비바람 아주 골고루 잘 차려진 일기예보가 무색하게 그나마 달리는 내내 눈비는 오지 않았지만,
초강력 바람으로 10킬로 지점에서 역풍을 맞은 모자가 뒤쪽으로 날아가버리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뒤로 다시 돌아가 멀어지는 모자를 겨우 잡아냈던 것만 빼면 전반적으로는 순조로운 달리기였다.
요즘 삼척은 유채꽃이 예쁘게 피어있다. 달리는 코스에 유채꽃을 볼 수 있다기에 기대하며 달렸다.
스타트를 하고 1킬로 지점까지는 볼 것 없는 도로 뿐이었다.
얼마간의 평지를 달리고 오르막을 지나 5km 지점쯤에 있던 한치터널을 지나니 다리건너편으로 바닷가가 한눈에 들어왔다.
바닷가 출신은 아니지만 노상 바닷가노래를 부르는 나는 반가워서 고개를 돌리고 바닷가를 한참을 쳐다보며 달리기를 했다. (강릉에서 달리는 바닷가 달리기가 더 좋긴 하다. )
풍속자체가 거셌는데 바닷바람까지 더하니 달리는 차 안에서 창문을 내려 들이닥치는 바람만큼 강력했다.
그런데 난 그런 바람맞는 걸 좋아한다.
7km를 지나고 나니 조금씩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길거리에 나오신 동네 주민들이 손뼉도 쳐주시고 파이팅을 외쳐주시고
배번호에 달려있는데 내 이름을 크게 불러주시면 , 나도 웃으며 손을 들어 흔들어본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내 이름을 불러주고, 내가 달리는 길 위에 마음을 얹어주는 귀한 느낌으로 무겁고 힘들던 몸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인간미가 피어나는 순간이다.
8km 정도 쯤되니 벌써 반환점을 돌아 내 옆을 지나가는 러너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왼쪽으로 노랗게 물든 유채꽃들이 평화롭게 바람에 흔들리는 게 아닌가!
심지어 주로 양옆에는 이제는 조금 시들해졌지만 벚꽃나무들이 달리고 있는 나에게 벚꽃 잎을 날리며 응원해 주는 듯했다.
사람들의 응원에 이어, 자연마저도 ‘너 잘하고 있어’라며 위로를 보내는 듯한 느낌이라 행복했다는 표현을 쓰고 싶다.
그 순간은 힘듦조차도, ‘지금 여기 있음’에 감사한 감정으로 바뀌게 만들었고, 달리기의 힘듬도 잊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사람이라는 글자를 빠르게 타이핑하면 "삶" 이 된다.
조금 서두르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게 ‘사람’이 아니라 ‘삶’이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달리기를 빠르게 하다 보면, 내 옆의 상황은 잘 보이지 않는다.
빠르게, 멀리 가는 것보다 중요한 건 지금 이 순간, 나와 함께 달리고 있는 존재들을 바라보는 것 내 옆에 피어있는 노란 유채꽃과 벚꽃 바람 구름 그리고 냄새들 까지도..
내 앞의 러너들을 따라가면서도 잘 달린다 폼이 멋지다가 아니라 이젠 이 사람은 무슨 이유로 달리기를 시작했을까부터 생각하게 된다.
그들이 뿜어내는 숨결과 땀방울 안에,
각자의 이야기가 있음을 안다.
슬픔, 회복, 희망, 사랑…
그리고 나처럼 무너지지 않기 위해 시작한 누군가의 용기일 것이다.
나는 무슨 이유로 달리기를 시작했을까?
내 영역이 아니라고 그렇게 손을 흔들었지만, 11개월 만에 하프 달리기를 하고 있으니 나 자신도 놀랍지만, 그것보다 튼튼해진 내 두 다리와 허벅지를 바라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심지어 나는 내 다리에 걸려 넘어지는 두 발로 걷는 것조차 겨우 걸어 다니던... 내실 없는 부실한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하프를 무사히 완주하게 되었다.
심지어 여기저기 기웃기웃 구경도 하고 생각도 하고 오르막을 오를 땐 인생의 힘듦을
내리막일 때는 새가 된듯한 가벼운 마음으로 바람을 맞으며 21km를 뛰면서 가장 짜릿한 순간을 느껴보기도 했고, 내 인생지도에 찍히게 된 멋진 장면이라고 기억될 것 같다.
GPS보다 더 정밀한 내 ‘마음의 지도'에 나의 하프코스 여정은 확실히 새겨졌다.
그래서 이제 나는 안다.
처음엔 그저 낯설고, 두렵고, 나와는 거리가 멀다고 느꼈던 이 길 위에서 하프를 완주한 오늘이 단지 ‘달리기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나를 시작하게 해 준 하나의 봄날이었다는 것을.
이제 나는 다시 묻는다.
“다음엔 어디쯤에서, 어떤 풍경과 함께 달리게 될까?”
내 두 다리가, 내 숨결이, 앞으로도 나를 어디든 데려다줄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이제 나는 ‘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더 멋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