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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연 Dec 04. 2024

정신분석과 꿈

 상담사(혹은 분석가)는 다소 통통한 체구에 온화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중년 여성이었다. 처음 정신분석을 시작했던 2020년 2월부터 2024년 12월 현재에 이르기까지, 상담을 1년 정도 중단했던 기간을 제외하면 벌써 4년 가까이 매주 한 차례씩 그녀와 만나고 있다.

 상담을 시작하고 나서 얼마 동안은 상담실에 마련된 검은색 카우치에 앉아서 내 얘기를 하는 게 주저됐다. 그녀의 앞에서 문제가 되는 증상 자체를 얘기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지만, 정작 ‘어떤 일’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는지에 관해서는 설명할 수 없었다.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

 “평범한 가정에서 큰 문제없이 성장했는데, 제가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그녀는 앞선 상담자와 달리 내 말에 자신의 판단을 덧붙이지도, 조소하지도 않았다.  

 “남연 씨가 느끼는 고통을 다른 사람의 고통과 비교할 필요 없어요. 누구에게나 감정은 고유하고 개별적인 것이니까요.”

 마치 내 안에 웅크리고 있는 불안을 향해 건네는 말인 것 같았다. 그녀의 부드러운 어조에서 단단한 힘을 느꼈다.


 아주 조금씩, 속에서 곪아 있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우선은 시간적으로 가장 먼 거리에 있는 유년기의 이야기부터. 그녀는 내가 두서없이 건네는 말들을 주의 깊게 들어주었다.

 그러던 중에 나는 그녀에게 어린 시절 일화의 한 토막을 얘기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무렵, 나는 한 때 위험천만한 행동을 놀이처럼 즐긴 적이 있었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자동차가 오는 타이밍을 노려 아슬아슬하게 길을 건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급정거한 차량의 앞 범퍼에 종아리가 닿았다.

 - 야, 이 미친년아!

 운전자가 창문을 열고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맨살에 닿은 선명한 감각 속에서 그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 생각해도 대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가 안 돼요.”

 나는 말을 마치고서 민망함에 웃음을 덧붙였다. 그러나 상담사는 웃지 않았다. 진지하고, 어쩐지 슬퍼 보이는 낯빛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린 아이가 자신의 상황을 힘들다고 느낄 때, 죽음에 대한 충동을 놀이의 형태로 치환해서 행동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나는 울고 있었다.  

 “이상하네요…….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요?”

 “아마도 그런 감정을 공감 받았다고 느낀 경험이 드물었던 거겠죠.”

 그 순간에 내 안에서 갑자기 어떤 문이 열리고, 새카만 밤이 밀려들었다. 허공 속에서 작은 존재 하나가 끝없이 낙하하고 있었다. 외로웠다. 그녀는 내가 편히 울 수 있도록 그저 조용히, 자리에 함께 있어 주었다.  


 얼마 뒤에, 괴이한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 한 친구의 손에 이끌려 커다란 빌딩 위층에 있는 마사지 숍에 갔다. 점원의 안내를 받아 탈의실에서 가운으로 갈아입고, 친구와 헤어져 어떤 방의 문을 연 순간에 불길한 예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과연 눈앞에는 마사지 베드가 아니라 병상 침대 여러 대가 놓여 있었다. 피에 젖은 이불들이 보였다. 그 안에는, 분명하게 시체가 있다는 걸 알았다.

 곧장 나는 문밖으로 내달렸다. 다행히 통로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문 바로 앞에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하지만 언제 직원들에게 발각될지 알 수 없는 일이었기에 초조하게 버튼을 눌렀다. 무사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이 닫히기 직전에 바깥에서 직원들이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대로 1층까지 내려가면 문이 열리자마자 붙잡히고 말 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어, 4층 버튼을 누르고 도중에 내렸다. 비상계단을 뛰어 내려가던 중에 나는 층계참에서 낯선 남자와 마주쳤다. 남자의 나이는 30대 정도로 보였고, 한손에 식칼을 든 채로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목 아래에 칼끝을 겨눈 채로 낮게 지껄였다. 이게 네가 원하는 거잖아.

 그 순간에 혼신의 힘을 다해서 그를 밀치고, 도망쳤다. 마침내 건물 밖으로 빠져 나왔을 때 운이 좋게도 바로 앞에 택시 한 대가 서 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올라탔다. 기사가 먼저 태연한 투로 나에게 물었다.

 “저 병원에서 나온 거예요?”

 나는 거짓말을 했다.

 “아니요. 제가 들린 건 그 옆에 있는 다른 건물이에요.”

 그러자 돌연 기사가 몸을 돌려 내 눈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흥! 거짓말하고 있네.”

 나는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꿈에서 깨어났다.


 나는 이 이야기를 상담사에게 전했다. 그녀는 의자에서 몸을 바짝 앞당긴 채로 내 얘기를 집중해서 듣다가, 마지막에 가서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 택시기사가 남연 씨의 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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