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생일
오늘은 첫째 아이의 생일입니다.
달력을 바라보다가 문득 멈칫했습니다. 태어난 해와 같은 요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잠시 과거로 돌아갔습니다. 마치 시간은 흘렀지만, 어떤 장면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남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아이를 기다리던 D-Day 전날에,
‘어떤 아이가 세상에 나올까?’
아내와, 말없이 같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기대와 설렘,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두려움이 뒤섞인 밤이었습니다.
약 11년 전, 바로 이 시간쯤 저는 병원에 있었고, 아이는 태어나서 인큐베이터 안에 있었습니다. 작고 연약한 몸, 숨소리 하나에도 마음이 내려앉던 순간들이었습니다. 다음 날, 회사에서 출산 선물로 과일바구니가 도착했습니다. 가족과 친지, 지인들이 병원을 찾아와 축하 인사를 건넸고, 저는 감사 인사를 하면서도 어딘가 멍한 상태였습니다. 축하를 받는 입장이 되었지만,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무게를 처음으로 느끼던 순간이었습니다. 그날의 저는 ‘부모가 되었다’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다만, 이제는 예전과 다른 마음가짐을 살아야 할 것만은 분명히 느꼈습니다.
그렇게 조그맣던 아이가 어느덧 이렇게 자랐습니다. 시간은 참 빠르게 흐른다는 말을 자주 하지만, 아이의 생일 앞에서는 그 말이 유난히 실감 납니다.
생일이라는 날이 가진 의미
아이의 생일은 단순히 나이가 하나 늘어나는 날이 아닙니다.
부모에게는 한 해를 무사히 건너왔다는 안도의 날이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 날이기도 합니다. ‘잘 키우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을 조용히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아이에게 생일은 기대와 설렘의 시간입니다.
12월이 되자마자 첫째 아이는 자신의 생일을 카운트다운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빠, 내 생일 며칠 남았는지 알아?”
“이번 생일에는 이거 받고 싶어.”
“생일날에는 이거 먹고 싶어.”
아이에게 생일은 기다릴 수 있는 즐거움이었고, 상상할 수 있는 기쁨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이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조금 찡해졌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바람을 또렷하게 말할 수 있을 만큼 아이가 자랐다는 사실이 새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아이의 생일이 다가올 때마다, ‘이번에는 기억에 남을 무언가를 해주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늘 소소하게 마무리됩니다. 아이스크림 케이크, 치킨, 떡, 떡볶이. 특별하지 않다고 느껴질 수도 있는 풍경이지만, 어쩌면 아이에게는 그것이 가장 익숙하고 편안한 생일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퇴근길에 마트에 들러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사서 집에 가는데, 아이의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집에 도착하니 아내는 이미 다른 음식들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집안은 조용히, 그러나 분주하게 아이의 생일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부모라는 이름의 책임감
생각해 보면,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시작되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 저는 ‘부모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무언가를 지켜야 한다’는 감각을 더 강하게 느꼈습니다. 그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분명 이전과는 다른 책임이 시작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했습니다.
아이의 성장은 기쁨이지만, 동시에 부모에게는 끊임없는 질문을 던집니다. 잘하고 있는지, 놓치고 있는 것은 없는지, 혹시 부족한 것은 없는지. 아이가 한 단계 성장할 때마다 부모의 역할도 함께 변해야 한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닫게 됩니다.
오늘 아이는 저녁 7시가 다 되어가도록 배가 고플 텐데도, 제가 집에 올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집에 오는 길에 전화를 걸어 “아빠, 언제 와?”라고 묻던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습니다. “지금 가는 중이야.”라는 말 한마디에 아이는 참고 기다렸습니다. 그 모습을 떠올리며 문득 생각했습니다. 아이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구나. 자신의 욕구를 잠시 미루고, 누군가를 배려할 수 있는 마음이 자라고 있구나.
부모의 역할은 아이를 앞서 이끄는 것만이 아니라, 아이가 스스로 자랄 수 있도록 옆에서 지켜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도와주지 않는 것이 더 큰 도움이 될 때도 있고, 말하지 않는 것이 더 많은 배움을 남길 때도 있습니다. 그 균형을 찾는 일이 부모에게는 가장 어려운 숙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건강함을 선택하는 다짐
아이를 키우면서 점점 더 분명해지는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부모로서 아이에게 가장 오래, 가장 안정적으로 줄 수 있는 것은 결국 ‘건강한 부모의 모습’이라는 점입니다. 아이에게 모든 것을 해주려 하기보다, 아이에게 부담이 되지 않는 존재로 오래 곁에 있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속으로 생각해 봅니다. 앞으로도 아이들에게 짐이 되지 않는 부모가 되자고. 몸과 마음을 관리하며, 아이들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어른으로 살아가자고. 부모의 건강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전체의 삶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갈 때, 부모는 언제든 돌아올 수 있는 안전한 자리로 남아 있어야 합니다. 그 자리를 오래 지키기 위해서라도, 스스로를 돌보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책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에게 “건강이 제일 중요해”라고 말하기 전에, 먼저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말로 가르치기보다,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부모가 할 수 있는 가장 진실한 교육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생일이 남기는 시간의 흔적
가족의 생일은 과거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때의 선택들, 그때의 마음, 그때의 다짐들. 잘 지켜온 것도 있고, 놓친 것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이 모여 지금의 가족을 만들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동시에 생일은 미래를 떠올리게 합니다.
앞으로 아이는 어떤 사람이 될지, 어떤 길을 걸을지. 그 길 위에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곁에 서 있을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바람만은 분명합니다. 가족 모두가 건강하고, 서로를 응원하며, 활기차게 살아가는 미래입니다.
오늘 아이의 생일을 맞으며, 저는 다시 한번 시간을 마음에 새깁니다.
"지나온 시간에 감사하고, 다가올 시간을 소중히 여기겠다고."
아이의 생일이 곧 가족의 생일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앞으로도 이 작은 축하의 순간들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싶습니다. 시간은 빠르게 흐르지만, 마음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않아도 된다고 믿습니다. 오늘만큼은 잠시 멈춰 서서, 아이의 생일이라는 이름의 시간을 온전히 느껴봅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해봅니다.
태어나줘서 고맙고,
함께 자라줘서 고맙고,
앞으로도 건강하게, 오래도록 함께 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