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척에게 사기를 당해 형편이 많이 어려웠던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살다 함께 모여산지 사실 몇 년 되지 않았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내가 직접 청약을 넣은 국민 임대아파트였는데,소득 조건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순간 쫓겨나는 임대 아파트.
그런 곳에서 산다는 것이 나에게 큰 압박으로 다가오게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나와같은 상황에 처해져 있거나 혹은 더 힘든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이기적이게도 본인 앞의
힘든 상황에만 초점을 맞추기 마련이다.
아버지의 빚과 학자금 대출, 매달 나가는 월세를내기도 빠듯한 이 거지 같은 현실 속에서 탈출하려면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어야 하는데, 가구원 소득 기준을 조금만 넘어도 국민 임대 아파트에선 살 수 없기 때문에 이사를 가야 한다는 그 현실이 내게는 큰 족쇄이자 제약이 되었다.
내가 더 성장할 수 있어도 작은 박스 안에 몸을 웅크린 채로 '나 아직 안 자랐어요'를 증명해야 하는 지독함.그것은 나를 무기력과 우울이라는 감정의 파도 속에 휩쓸리게 만들었다.
그때 당시의 나는 교육 대학원을 졸업 후 취업을 하려다 전문상담교사 임용 고시에 도전하게 되었는데, 그 시기가 나에게 있어 가장 길었던 암흑기라 말할 수 있겠다.
지금에 와서야 말할 수 있지만 나는 그저 아이들과 대화하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것이 좋은 사람이었을 뿐. 임용고시라는 선택에 있어서 나라는 존재는 없었다.
부모님과 당시 교제하던 남자친구를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안정성 있는 직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고시 공부를 시작함과 동시에 아버지의 진단 소식을 듣게 된 터라 의지와 결심은 바닥으로 추락하게 되었고 코로나 유행까지 시작되어 강제로 집에 있어야만 했다. (코로나는 특히나 폐에 더 취약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가 집에서
공부할 수 없는지 부탁을 하셨다)
그때 다시 한번 고등학교 교생실습을 하던 때를 떠올리며 상담 교사의 길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코로나 시기에 짧게 만났던 사랑스러운 첫 제자들
인간의 심리는 섬세하고 복잡한 체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솔직히 자신조차 본인을 잘 모르는 경우가 수두룩할 때가 있다.
나도 나 자신을 잘 모르는데 다른 이를 이해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모순과도 같은 느낌이었고,
나의 말 한마디로 자라나는 아이에게 끼치게 될 영향을 상상할수록 두려움과 불안함은 나날이 커져만 갔다.
결국 그렇게 나의 첫 번째 임용고시는 계속된 고민과 두려움 속에서 뼈 아픈 성장통을 겪으며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