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41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습작의 창고

절대 정치이야기 아닙니다. 철학이야기입니다. 아마도요,

by 나바드 Mar 21. 2025



낙화 (조지훈)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늘도 이곳을 떠나고

나를 부른다.



낙화 (이형기)


이즈음 어느 날

그날도 바람이 불고

꽃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꽃이 떨어지고

내가 그 꽃을 붙잡으려 했을 때

이미 꽃은 떨어지고 있었다


그 꽃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꽃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같은 건 같고, 다른 건 다르다는 철학의 아름다움


어떤 이의 생각도 틀리지 않다고 믿으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시간에 피고, 또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진다. 조지훈의 「낙화」와 이형기의 「낙화」는 같은 제목을 지녔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결을 지닌다. 그 차이는 마치 우리가 하나의 사건을 두고도 각기 다른 해석과 시선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그 자체로 존재의 다양성을 말해준다.


조지훈의 시가 ‘아름다운 퇴장’에 대한 이야기라면, 이형기의 시는 ‘붙잡을 수 없는 상실’에 대한 이야기다. 전자는 ‘의지’가, 후자는 ‘비애’가 중심에 있다. 하나는 스스로 물러남을 통해 꽃다운 청춘을 완성하려는 결연함이고, 다른 하나는 그저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는 연민이다.


그런데 이 두 시가 같은 제목을 공유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낙화라는 단어 자체가 ‘아름다움의 절정에서 오는 소멸’을 의미하기에, 인간 삶의 불가피한 소멸과 변화 앞에서 느끼는 감정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공통된 진실이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사회는 마치 봄날 끝자락에서 바람에 꽃이 흩날리는 듯한 혼란과 혼동 속에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무언가를 붙잡으려 한다. 어떤 이는 조지훈처럼 스스로 물러나야 할 때를 아는 지혜를 주장하고, 어떤 이는 이형기처럼 그 꽃을 끝내 잊지 못하겠다고 말한다.


정국의 변화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과거를 영광이라 말하고, 누군가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단호히 이별을 선택한다. 같은 사건, 같은 풍경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중요한 것은, 같은 건 같고 다른 건 다르다는 원칙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민주’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조지훈은 말한다. “지금은 가야 할 때”라고. 이형기는 말한다. “나는 그 꽃을 잊지 못한다”고. 한 편은 현재를 떠날 준비를, 다른 한 편은 과거를 잊지 않으려는 마음을 담고 있다. 어떤 진실이 더 아름다운가를 묻기보다, 두 진실이 나란히 존재할 수 있는 사회가 더 필요하다.


결국, 낙화란 피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꽃이 진다는 것은, 그 꽃이 한때 분명히 존재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 공동체 역시, 언젠가 피었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은 그것이 흩날리는 시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꽃잎들이 흩날리며 흙으로 돌아갈 때, 뿌리 아래에는 새로운 생명이 자라고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앞으로 어떤 꽃을 피워야 할까.

그 꽃은 우리가 붙잡아야 할 기억일까,

아니면 기꺼이 떠나보내야 할 순간일까.

그 모든 질문이 우리 안에 살아 숨 쉬는 한,

이 사회의 낙화는 끝이 아니라 다음 계절의 시작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습작의 창고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