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에게
3개월 전 화분 몇 개를 들여왔다.
새로 이사 온 집 베란다가 너무 휑해 어떤 것으로 채워 놓으면 좋을까 한참의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처음엔 빨래 건조대나 실내용 자전거를 놓을까 생각하다 공간이 좀 어정쩡하여 탈락시켰다.
두 번째로 원형 티 테이블과 미니 의자들을 놓아둘까 생각도 해 봤다. 하지만 주로 땅바닥에 앉아 다리를 쭉 뻗고 커피를 마시며 책 읽는 걸 즐기는 나와는 거리가 먼 우아하디 우아한 티 테이블도 탈락.
“화분을 몇 개 키워보지 그래?” 하는 언니의 말에 이거다 싶었다.
잘 키울 수 있을까 걱정은 한 가득이었지만 좋은 생각이다 싶어 바로 실행에 옮겼다.
풍수지리와 실내 장식에 관심이 많은 지인분의 추천으로 잎의 모양이 동전과 닮아 돈이 잘 들어온다는 보석금전수를 하나 안아 들고, 예전에 키워본 적이 있는 로즈메리와 장미 허브도 각각 하나씩 데려왔다.
금전수는 거실 탁자에 놓고 나머지 두 개의 화분은 베란다에 놓아두었다.
꽃가게 이모님께서 허브들은 여름에는 이틀에 한 번씩, 시원할 때엔 일주일에 두 번씩 물을 주고, 금전수는 한 달에 한 번만 물을 주면 된다고 알려 주셨다.
여태껏 나는 장미 허브는 당연히 빨간색이라 단정 지어 믿고 있었다.
누가 알려준 적도 없고, 물어본 적도 없으면서 '장미'라는 이름에 내 맘대로 빨간 옷을 입혀 놓고 우습게도 한 치의 의심 없이 그렇게 믿어 버렸던 것이다.
옆에 계시던 선생님이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아직도 우물 안 개구리처럼 ‘빨간 장미를 닮아 붉고 앙증맞은 잎들이 참 예쁘겠다.’라고만 생각하고 있었겠지.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 향이 짙게 배어 나와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는 로즈메리와 아기의 피부처럼 자꾸 만지고 싶게 만드는 보슬보슬하고 오동통한 잎과 은은하면서 매력적인 향을 가진 장미 허브, 묵묵히 잘 자라주고 있는 맏형 금전수까지 모두가 내겐 너무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아침에 눈을 뜨면 베란다로 달려가 둥근 화분 주위로 뻗어 나온 잎들을 하나하나 만져주며 ‘밤새 이만큼이나 자라줘서 고마워.’ 인사를 한다.
퇴근 후에는 ‘오늘 하루도 잘 견뎌줘서 고마워.’ 나 자신에게 인지 꽃들에게 인지 모를 말을 나지막이 건넨다.
베란다에 갇혀 한여름 더위에 지쳐 쓰러지진 않을까 걱정되는 마음에 이틀에 한 번씩 물을 듬뿍듬뿍 주었다.
그런데 내 사랑이 너무 과했나 보다. 무작정 잦은 횟수로 주기만 하면 잘 자랄 것 같은 안일한 생각으로 인해 로즈메리의 뿌리가 조금 썩어가고 있었다.
썩은 뿌리 몇 개를 뽑아내고 일주일에 두 번씩만 물을 주기로 하였다.
상대방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나 혼자서만 일방적으로 마음을 쏟아붓고 있었구나! 넘쳐흘러 독이 되는 줄도 모른 채….
적당히 마음을 줄 것을. 그럼 그 아이도 그만큼 아프지 않았을 텐데….
적당히, 그 적당히가 참 쉽지 않은 일이다. 30년을 넘게 살아왔음에도 아직 적당히의 크기를 잘 알지 못하겠다.
이를테면 적당히 마음 주는 일, 적당히 상처받는 일, 적당히 잊어주는 일, 적당히 아파하는 일 같은 것들 말이다.
앞으로 30년쯤 더 살아보면 그때는 알게 될까….
장미 허브가 너무 잘 자라주어 더 넓은 곳으로 가지 몇 개를 잘라 분갈이를 해 주었다.
2주. 2주가 지나면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릴 거라 했는데 만져보기엔 그대로인 것 같았다. 성질 급한 나는 그새를 못 참고 뿌리를 뽑고 말았다.
아뿔싸! 뿌리 밑 부분에 조그맣게 새순이 나고 있었다.
‘아! 조금만 더 기다려 볼걸. 미안해. 내가 미안해.’
다시 새 장미 허브들로 바꾸어 꽂아 놓았다. 이번에는 한 달은 얌전히 기다려 봐야지.
최근에는 친구에게서 애플민트와 달콤한 바질 소형 화분도 하나씩 선물 받아 베란다에 향기 나는 예쁜 친구들이 오밀조밀 늘어가고 있다.
‘아프지 말고 언니와 오래오래 행복하자.’
오늘도 이렇게 향기 나는 친구들에게서 참을성과 인내력, 사랑을 주는 법과 어른이 되어가는 법을 배워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