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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인간이라는 실패의 반복

사유의 무덤 위에서,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논한다

by 하진
cigarette-110849_1280.jpg ⓒ Pixabay

레비나스는 ‘말함’과 ‘말해진 것’을 구분했다. 말해진 것은 이미 식은 언어이기 때문이다. 사유의 사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말했을 때도, 그는 이미 ‘생각’이라는 감옥에 들어간 셈이다. 그곳은 빠져나올 수 없는 무한의 굴레다.


그럼에도 철학은 사라지지 않는다. 현상학의 세계 속에서 철학자들은 여전히 이상을 꿈꾸고, 현실과 동화의 경계를 오가며, 닿을 수 없는 답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만약 인간이 단순히 동물이 진화한 결과라면, 그렇게까지 애써 ‘이유’를 찾아야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동물은 살아가기 위해 존재하지만, 인간은 살아있다는 사실에 이유를 묻는다. 아마 그게 우리가 끝내 사유를 멈추지 못하는 이유다. 우리가 계속 ‘왜’를 묻는 건, 결국 잃어버린 방향을 찾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웃기게도 인간은 같은 목적을 두고 싸우나, 그 방식은 늘 비효율적이다.


인간은 본능의 에너지가 사회적 질서 속에서 원활히 순환하는 상태를 이상으로 그린다. 그러나 그 이상은 언제나 제자리를 맴돌며 완결되지 못한다. 이성의 관점에서라면 해법은 분명하다. 각자의 능력을 조율하고 협력하면 된다. 하지만 이성의 단순함은 언제나 본능의 복잡성 앞에서 무너진다.


생각이 멈추는 순간, 인간은 다시 본능으로 돌아간다. 이상은 노래로만 남고, 현실은 욕망의 무게로 기운다. 이성은 길을 그리지만, 욕망은 그 길을 비틀며 다른 곳으로 이끈다. 지배와 거부가 얽혀도, 우리의 시선은 끝내 하나의 지평으로 모인다.


조금 덜 부서진 세계, 그리고 조금 더 인간적인 삶. 우리는 그 불가능한 꿈을 붙잡은 채, 서로를 상처 내며 여전히 살아간다. 희망을 의심하면서도, 결국 희망 속에서만 숨을 쉬는 존재로서. 사형수의 마지막 숨결까지 함께 짊어지려는 마음으로 말이다.


사형이 살인보다 한결 더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 재판관의 냉혹함, 고통스러운 준비, 한 인간이 다른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통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떤 죄가 있다고 해도 그 죄 자체가 처벌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죄는 교육자·부모·환경·우리에게 있는 것이지 살인자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것은 살인을 일으킨 상황들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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