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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의식의 경계를 넘어서

사라지지 않은 울림

by 하진

※ 본 글은 레비나스의 사유를 바탕으로, 독해를 시도한 글입니다. 정통 학술 해석과는 다소 결이 다를 수 있으며, 개인의 사유 흐름에 따른 재조명임을 밝혀둡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그린비, 문성원, 초판 2쇄 20240411

ⓒ Unsplash


감성적인 것은 순수한 수용의 한 노에시스가 보이는 번뜩이는 순간이라 할 현시 속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노에시스 그-자체도 시간적 늘임(étirement.)을 가지며 시간 속에서의 구성을 갖는다. 노에시스는 그것의 지향 속에서 질료 배의 물질성을 지시한다.


감성적인 것은 직관에 의해서 드러나지 않는다. 의식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지연되고,또 그 안에서 형태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의식은 그러한 지향 속에서 형태의 본질과 구성을 지시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다. 감성은 어떤 기호인지, 어떠한 구조로 표현되는지를 지시할 뿐, 그것의 본질 그 자체를 접하지는 못한다.


참고

문맥상 후설은 순수한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방법으로, 직관을 제시한 것 같다. 가령, 테이블에 사과가 놓여있는 상황이라고 해보자. A는 즉시 “저건 사과다”라고 말한다. 한편, B는 뜸들이다가 “저건 배인가? 아니다. 사과구나” 라고 말한다. 이 경우에는 A가 본질에 더욱 가깝게 접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의식의 지연은 주관적 관점이 개입될 확률을 높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의식은 감성적인 것을 포착할 수 없다고 말한다. 첫 번째 이유는 의식은 그 자체로 지향성을 갖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그저 그 자체로 지연되기 때문이다. 의식은 이미 구성된 지향성 속에서, 이미 주어진 구성을 지시하는 역할에 그친다. 그러니, 흐름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감성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한다.


소리, 색깔, 딱딱함, 물렁물렁함 등의 감성적 성질, 즉 사물의 속성들인 감성적 성질 역시 심리적 삶으로서의 시간 속에서 체험될 것이다. 물리학자의 측정 가능한 시간 속에서 지속되거나 변화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시간적 국면들의 연속 속에서 풀리고감기면서 말이다.


소리, 색깔, 딱딱함, 물렁물렁함 등의 감성적 성질들은 삶에서 쉽게 접할 수 있다. 물리학자처럼 측정 가능한 형태로 그것을 보지 않더라도, 이어지는 시간의 연속성 속에서 풀리거나 매듭지는 형태로 보여진다.


참고

‘아픔’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일일히 어떤 상태일 때 통증을 느끼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떠한 정도로 고통이 느껴지는지를 측정할 필요는 없다. 그냥 우리는 아파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을 뿐이다. 이러한 성질들은 수치나 개념으로 환산되지 않더라도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다만, 측정될 수 없고, 시도때도 없이 변하는 그 성질 때문에 무시된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시간의 흐름을 감각하게 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아닌가. 어릴 때 어린왕자를 읽으면 별 생각 없다가, 고등학생 때는 묘하게 느낌이 달라지고, 한참 후에 문득읽다 눈물을 터뜨리는 그런 경험 말이다.


후설은 여기에 견해를 같이한다. 후설은 우리 시대의 인물로서 이런 점을 내세우며, 그의 주장의 몇몇 측면에 따르면 그 스스로반대할 것처럼 보이는 가르침을 재구성해 낸다. 감성적 성질들은 단지 감각된 것만이아니다. 그 성질들은 감응적(affectif) 상태로서의 감각함이다.


후설도 마찬가지로 이런 의견에 동의한다. 그의 주장 중에서 몇몇 측면은 본인 스스로도 반대할 것처럼 보이는데도 말이다. 감성적 성질들은 이미 감각된 것이 아니라, 계속변해가는 상태로서의 감각이다.


참고

감각을 떠올리면, 흔히들 ‘말랑하다’거나 ‘딱딱하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느껴지는 감각이 계속 변할 수 있는가? 신기한 점은, 문학이나 예술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한다. 어떤 예술작품에 대한 감각, 아니 정확히는 감응ㅡ그 울림에 가까운 무언가의흐름은 실시간으로 변한다.


감각함에 객관적인 색깔과 소리를 식별하는 지향성을 빌려준다고 해봐야, 감각함은 이 색깔들과 이 소리들 의 응축된 표현인 것이다. 감각함은 감각된 것을 "닮는다". 어떤 사물이란 객관적인 것과 체험된 것에 공통적이다. 후설에서 시간에 대한 내적 의식, 그리고 단적인 의식은 감각의 시간성 속에서 기술된다.


감각하는 것에 대해, 객관적인 색깔이나 소리를 식별하는 방법을 빌려준다고 해봐야 별 의미가 없다. 감각한 것을 옮겨봐야, 이미 감각된 것과 비슷한 형태로 옮겨질 뿐이다. 어떤 사물은 객관적-체험된 것에 공통적이다. 그러나 후설의 내적 의식과 단적인 의식은, 감각의 시간성 속에서 흐른다.


"감각함, 그것은 우리가 시간의 원초적 의식으로 취하는 바로 그것이다." 또 "의식은 인상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시간, 감성적 인상, 그리고 의식은 하나로 결합한다. 체험의 이 원초적 차원에서는 순수 내재로 환원된 흐름 이 객관화의 혐의까지도 배제해야 하는데, 이 차원에서조차 의식은 지향성으로 머문다.


감각한다는 것은, 우리가 시간의 순수한 형태로 돌아가는 바로 그것이다. 애초에 의식도 인상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본다. 그러므로 시간과 감성적 인상, 그리고 의식은 하나로 결합한다. 이러한 원초적 차원에서는 객관성도 배제해야 하는데, 그러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의식은 이미 지향성을 전제한다.


참고

애초에 우리가 글을 쓰던, 무언가를 해석하던가 소통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의식을 거친다. 그리고, 그 의식은 기본적으로 인상과 느낌의 흐름같은 것들이 뒤섞인다. 객관적이라는 기준조차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애초에 객관성을 완전히 배제한다는 것이 가능한지조차 불분명하다.


이제 막 지나갔고, 막 오려 한다. 그러나 동일성 안에서 달라짐, 변하는 순간을 유지함, 그것은 "미리-잡기" 또는 "다시-잡기"다! 동일성 속에서 달라짐, 바뀜 없이 변양됨. 의식은 인상이 그 자신과 사이를 벌리는 한, 아직 기대하거나 이미 회복되기 위해 인상 속에서 빛난다.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지나간 것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다가올 것도 아직 오지 않았지만 내 안에서 회복되기 위해, 인상속에서 빛난다. 그렇게 시간은 ‘이미 지나간것’과 ‘아직 오지 않은 것’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머물고, 진동하고, 간섭한다.


아직, 이미-이것이 시간이다. 그래서 시간 속에서는 아무것도 상실되지 않는다. 과거 그 자체는 동일성의 바뀜 없이 변양되며, 스스로를 저버리지 않은 채 자신과 사이를 벌린다. 스스로 "더욱 낡아 가면서" 더 깊은 과거 속으로 빠져든다. 다시잡음의 다시잡음에 의해 스스로와 동일하게 되는 것이다.


시간은 언제나 “완전히 지나간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시-잡히는 잔향”으로 존재하고, 예감 역시 언제나 “완전히 오지 않은 것”이 아니라 이미 어렴풋이 “미리-잡힌 어떤 울림”이다. 과거를 되돌리는 것도, 미래를 앞당기는 것도 아니지만, 그 모든 시간들은 현재의 감각 속에서 진동하며 살아 있다.



Point

후설: 여러분, 오늘은 의식을 배워볼까요? 의식의 지향성이 세계를 연다구요.

하이데거: 선생님, 의식보다 존재가 먼저입니다. 시간 속에서 던져진 현존재, 몰라요?

레비나스: 의식이나 존재보다, 타자가 먼저입니다. 의식 바깥에서 도래하는 타자는 우리의 언어를 넘어서죠.


후설: 아니, 타자도 결국 의식 속에서 나타나서 해석되는 건데, 의식의 지평을 벗어난다고요? 그 바깥에서 도래해요? 그건 내 체계에서는 설명이 안 되는데...

하이데거: 존재... 시간... 존재... 시간...

레비나스: 타자는 의식에 붙잡히지 않습니다. 얼굴은 시간의 구조까지 흔듭니다. 형상없이 다가와 울릴 뿐, 그러나 그 한계 너머—존재 너머—를 열죠. 저는 이 경험을 모두가 이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 설명은 어쩌면 불완전합니다. 다음은 후대 연구자의 몫이겠지요.


#윤리 #레비나스 #철학 #타자 #차연 #죽음 #삶 #존재와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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