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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전체성의 폭력

보편성과 전체주의의 위험성

by 하진

※ 본 글은 레비나스의 사유를 바탕으로, 독해를 시도한 글입니다. 정통 학술 해석과는 다소 결이 다를 수 있으며, 개인의 사유 흐름에 따른 재조명임을 밝혀둡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그린비, 문성원, 초판 2쇄 20240411

ⓒ Pixabay


의미작용과 실존이냐 비-실존이냐 하는 문제가 궁극적인 문제인가? 의미작용의 의미함이나 이웃의 근접성 배후에 신의 실존 문제를 놓는다고 해보자. 이것은 이를테면, 신의 실존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겠다는 욕망에, "무"와 같은 단어들에 속지 않겠다는 욕망에 상응할 것이다.


의미작용과 존재 유무가 정작 중요한 문제인가? 신의 실존을 예시로 들어보자. 텍스트를 따라가며 의미를 짚어보는 과정에서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한치의 의심도 하지 않겠다’는 욕망과 ‘무(無)에 속지 않겠다’는 욕망이 동시에 겹치게 될 것이다.


참고

인간은 쉽게 투사하고, 결핍-욕망을 구분하지 못하며, 확증편향을 피해가기 힘들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평소 감정을 해석하거나 성찰해도 시간이 지나서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사고를 밀고 나가면, 결국 어떤 판단도 내릴 수 없다. 모든 것이 조건부 가능성과 상대성 속에 떠다니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는 통합 가능한 보편성과 증명 가능한 기준을 세워, 이성적 체계와 판단 체계를 구축해왔다. 이 과정에서 정작 문제는 발생한다. 서로 다른 개체들마저도 체계의 기준에 따라 판단되고, 소수의 감각은 너무 손쉽게 비이성적, 비합리적인 것으로 폐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의 철학이 어김없이 되돌아가는 전체성과 유효성의 특권을, 통속적인 확실성이 비롯하는 전체성과 유효성의 특권을 보여 주는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철학이 전체성—서로 다른 개체를 동일화하는 폭력—과 유효성—존재유무로 환원되는 판단 구조—으로 되돌아가는 경로를 반복하는 셈이다.


참고

모두가 똑같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로봇이다. 그러나 사회는 ‘정상’이라는 기준 아래 사람들을 하나의 범주로 묶으려 한다. 그 결과, 세심함은 ‘예민함’으로 취급되고, 동정은 ‘미련함’으로 낙인찍힌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누군가는 예민해야 위험을 빠르게 포착할 수 있었고, 누군가는 한 분야에 깊이 몰입함으로써 탁월함을 발휘해야 했다. 또, 어떤 이는 다소 무모하더라도 즉각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이 있었다.


다양성은 인간 생존의 조건이자, 공존의 기반이다. 그럼에도 사회는 이러한 가능성을 지운다. 정상은 통계적 평균을 윤리적 기준으로 착각한 결과일 뿐이다.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왜 다양성은 존중되지 않는가.


신의 실존 문제를 의미작용에 반하여, 타자를-위한-일자에 반하여 제기한다고 해보자(이 타자를-위한-일자는 세계에 거주하는 인간의 이해관심의 목적성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렇게 신의 실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존재(être)의 통일성이나 그것의 존재(esse)의 일의성에 머무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를 ‘존재 전체’로 오해하고 있으며,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의 틀 안에 가두려 한다. 신이 실존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존재론적 분류로도 포섭되지 않을텐데 말이다.


참고

인간이 세계의 전부라고 믿는 태도는, 마치 어항 속 물고기들이 주어지는 먹이를 세계의 일부로 여기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고기가 인간을 인식할 수 없듯, 인간 역시 인간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완전히 인식하거나 포섭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양태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존재는 유효성 속에서 반-작용 및 작용에 대한 저항 속에서 확인될 것이고, "고려 선상"에 들어갈 것이며, 계획을 동반하는 계산 속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는 존엄성의 차이, 높이의 차이, 거리의 모든 차이들이 마치 환상이나 배부른 의식의 화려한 능란함처럼 무너져 내린다.


존재는 매번 다양한 양태로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보편성-개념화에 종속된 언표로 고정될 것이고, 그것은 계획적이고 계산적인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거기서는 서로 세부적인 차이들을 착각으로 밀어내고, 계산에서 어긋나는 모든 것들을 환상이나 의식의 오류인 것 마냥 치부할 수 있겠다.


참고

누군가는 증명되지 않는 현상을 겪고, 말로는 설명할 수 없어도 묘한 기류나 징후를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은 객관적기준의 ‘정상성’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흔히 환상이나 착각으로 치부된다. 하지만 그 체험이 당사자에게는 실재였다면, 그것을 외부에서 부정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오히려 그들이 감지한 것이 진리에 대한 유의미한 단서를 제공할 수도 있지 않은가. 설령 착각이었다 하더라도, 스스로 그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다면, 필요할 때는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되, 배제하지 않아야 한다.


거기서는 초월의 모든 심연이, "유비의 통일성"에 금을 긋는 모든 간격들이 채워지고만다. 이 성공의 철학은 그 스스로 성공을 보증한다. 사람들은 신이 가진 최상의 유효성에서 출발하여 인간의 탈이해관심을 보증하고자 할 수 있으며, 정신이라 불리는 존재의 통일성과 전체성의 철학 위에 종교적인 것을 앉히고자 할 수 있다.


거기서는 인간을 뛰어넘어 도래하는 가능성들이, 전체성의 폭력에 의해, 모든 오차의간격을 채운다. 이런 방식으로 전개되는 논리 위에 세워진 철학은 언표의 성공에 대하여, 스스로 성공을 보증하는 구조를 띈다. 그 결과, 초월은 ‘존재자 중 가장 강력한 하나’로 환원되고, 신은 완전한 유효성을 갖춘 상위 존재자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초월은 통제 가능한 질서로 사육된다.



Point

- 존재의 서로 다른 차이는 이해되지 않고, 전체성과 진리의 이름 아래 하나로 통합된다.

- 인간은 인식 가능한 것이 전부라 착각한다. 초월은 인간에 종속되지 않으니까 초월이다.

- 존재 유무를 논하기 전, 타자에 집중해라.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너무도 나약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덕분에, 서로 도울 수 있었으니까.

왜, 우리는 쉽게 잊는가?
지나가는 고통에 멈춰서며
스스로를 던진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숨을 쉬고 있다.

사라지지 않은 이름들,
도달하지 못했기에 울리는 얼굴.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빚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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