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남겨진 사람의 특권

잃은 자리를 품고도 계속 살아간다는 것

by 현해

죽으면 끝.

슬픔은 남겨진 사람의 몫입니다.


작은 아주버니는 대학 때부터 사귄 작은 형님과 결혼해 어느덧 인생의 절반 가량을 함께했는데 40대 중반에 홀아비가 되었습니다.

단정하면서도 깜찍하게 옷을 입고 다니던 삼 남매는 졸지에 엄마 없는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시어머니는 자식 앞세운 부모가 돼버리셨습니다. 까탈스럽지 않고 무던하던 털팔이 둘째 딸이 멀리 살아 아쉬워했더니 아예 돌아올 수 없을 만큼 가버렸어요.


욕의 어원을 알고 나면 무심결에라도 쓰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나쁜 말이라서가 아니라 그게 내포한 뜻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입에 담기도 싫어서입니다.

홀아비, 엄마 없는 아이, 자식 앞세운 부모... 쉽게 규정짓고 고유명사처럼 딱한 처지를 일컫던 말을 이제는 감히 쓰지 못하겠요.

작은 아주버니도, 조카들도, 시어머니도 부디 그 틀에 갇히지 않았으면 좋겠요.


금요일 밤늦게 사망선고를 받아 토요일 아침에 빈소를 꾸리고 일요일 오전에 발인을 했습니다.

장례식에는 조카들 친구의 엄마이자 작은 형님과 언니, 동생 하는 동네친구들도 많이 오셨습니다.

아이들을 보는 조문객의 눈에 안타까움이 그득했습니다.

앞으로 아이들은 그런 눈빛을 얼마나 더 받아야 할까요?

젊은 엄마들이 많았데도 일요일 새벽부터 눈이 퉁퉁 부은 채 다시 온 분들도 계셨어요.

경황이 없다가 나중에서야 아이들에게 물어 그 '이모'들의 연락처를 받았습니다.

이웃에 가까이 계시니 좀 챙겨봐 달라는 염치없는 부탁을 다섯 분께 드렸어요.

가끔 안부 연락이라도 하고 지내려 했지만 어림없네요.


첫째 조카는 중학생이 된 뒤로 긴 손톱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저 깎기 귀찮아서라는데 저는 볼 때마다 간 빼먹는 구미호 같다는 둥, 네가 숙모 딸이었으면 그렇게 기르는 건 어림없었을 거라는 둥, 엄마는 그 손톱 보고 뭐라 안 하시냐는 둥 놀림 섞인 꼰대질을 해댔습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엄마를 언급하면 앞으로 마나 상처받을까, 발인 날 아침을 먹고 잠시 쉬는 동안 큰 조카의 손톱을 보며 멍하니 있었습니다.

제 눈길을 느꼈는지 딸내미들이 각자 손톱을 한 번씩 쳐다보더니 "이제 ○○이(셋째) 손톱은 누가 깎아주지?" 합니다.

자기들도 오른손이니까 왼쪽 손톱은 깎겠는데 오른쪽은 어쩌냡니다.

엄마가 없다는 게 이렇게 하나둘씩 현실적으로 다가오겠죠.

책을 좀 추천해 주려는데 엄마 얘기가 나오는 걸 거르다 보니 동화책은 싹 빠지고 논픽션만 남길래 망연자실했습니다.

그만큼 생각보다 자주, 많이 엄마의 빈자리를 느낄지도요.


남편은 조카들과 땀 뻘뻘 흘리며 뛰어놀기도 하고 보드게임을 몇 시간씩 함께하는 외삼촌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른들한테 버르장머리 없이 굴 땐 누나가 약간 서운해할 정도로 눈물 쏙 빠지게 혼쭐 냈는데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요?




거울에 비친 내 모습 종종 불만족스럽습니다.

왜 제 또래 여성들이 셀카 대신 애들 사진, 음식 사진, 꽃 사진을 찍는지 십분 이해되죠.

폴라 프라이크는 지기 직전에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라넌큘러스를 좋아했다지만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죽기 전에 아름다운 삶이었다고 회상하는 것과 별개로, 가장 화려했던 순간 이후 시들어가는 과정에서도 나름의 아름다움을 보일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실제로 저는 꽃을 살 때 만개했다가 팍 시들어버리는 라넌큘러스나 수국보다 들국화류를 선호합니다.

작은 형님은 모두의 기억 속에 라넌큘러스처럼 한창때의 모습으로 남겠죠.

대신 저는 고운 주름 만들어가며 '늙을 수 있는 특권을 누려야지' 마음먹기로 했습니다.


큰 아주버니는 골프를 치신 지 좀 되었고, 작년 여름부터는 저희 신랑이, 가을부터는 제가, 겨울부터는 큰 형님이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작은 형님은 나중에 자기도 골프를 배워서 세 부부가 같이 쳤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e스포츠를 좋아하는 작은 아주버니는 다소 비협조적이셨는데 이제 압박에서 해방되셨네요.

작은 형님이 좋아하던 물놀이도 이제 우리끼리 즐기겠습니다.

약 올리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어째 쓰고 보니 삐딱선이네요. 어휴-


죽으면 끝.

좋은 세상을 누리는 것도 남겨진 사람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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