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한
정선군 고한읍은 탄광촌이다. 어린 시절 고한에서 자주 보이던 풍경 중 하나는 검은 돌로 가득한 산비탈이다. 산의 한쪽 면에 탄광에서 나온 검은 돌들을 계단형으로 차곡차곡 쌓아 비탈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검은 산비탈의 꼭대기에는 버려진 사무실 건물이 있었다. 검은 산비탈에는 꽃도 나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동물들도 잘 지나다니지 않았다. 먹이도 없고 숨을 곳도 없으니 당연하다. 생명이 없는 검은 산비탈과 그 꼭대기 버려진 회색 건물. 멈춰버린 흑백 텔레비전 같았다.
집 근처에 이런 검은 산비탈이 있었다. 놀이터 옆으로 돌아나가면 버려진 사무실이 있었고, 그 앞으로는 검은 돌들이 비탈을 이뤄 내려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종종 친구들과 모닥불을 피워 놀았다. 사무실 내 한켠을 치운다. 마을에서 주어온 박스 때기 들을 펼쳐서 앉을 곳을 만든다. 근처 산으로 올라가서 죽은 나뭇가지들을 모아 온다. 작은 나뭇가지들을 먼저 얼기설기 쌓는다. 이때 가운데에 공간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 공간으로 불을 붙인 신문지를 넣어준다. 간혹 신문지에 불은 어떻게 붙이냐고 묻는 경우가 있다. '부싯돌을 쓰니? 아니면 나뭇가지를 비벼서 불씨를 만드니?' 촌동네라고 오지는 아니다. 그 옛날이라고 문명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보통은 아부지들이 쓰시는 성냥개비 몇 개를 가져다가 벽돌에 긁어서 불을 붙인다. 신문지는 짧고 굵게 타오른다. 이내 '타닥타닥' 나뭇가지가 타는 소리가 난다. 작은 가지들이 타기 시작하면 그 위에 큰 가지들을 쌓는다. 박스 조각으로 열심히 부채질한다. 불길이 잦아들 것 같으면 강렬하게, 불길이 살아 오르면 살포름하게 강도를 조절한다.
불이 활활 타오르면 불장난을 시작한다. 불장난이라고 별거 없다. 눈에 보이는 아무것이나 태워보는 것이다. 처음에는 비닐이나 페트병을 막대에 꽂아서 태워본다. 잘 타기도 하고 녹으면서 흘러내리는 모습이 재미있기도 하다. 그러나 검은 연기가 많이 나고 냄새도 역해서 조금 해보고 만다. 그다음은 돌멩이를 태운다. 태운다기보다는 데운다. 돌멩이가 빨갛게 달궈지면 물 웅덩이에 던진다. '치익~'하는 소리와 하얀 수증기가 오르며 식는 모습이 재미있다. 가끔은 달궈진 돌멩이를 잘 못 만졌다가 손 끝을 디어서(강원도에서는 데다는 말을 디다라고 했다.) 쓰리고 물집이 생기기도 했다. 이것도 몇 번 하다 보면 금방 질린다. 아무래도 더 재미있는 것은 악한 동심이 발휘될 때이다. 주변에 눈에 띄는 벌레들을 잡는다. 거미가 잴 만만하다. 나뭇가지 두 개로 젓가락을 만들어 거미를 집고 불 가까이 가져간다. '타다닥' 삽시간에 쪼그라들면서 타버린다. 너무 작아서 심심하다. 밖으로 나가서 다른 벌레들을 잡아온다. 메뚜기나 여치들은 좀 괜찮다. 다리를 붙잡고 태우면 발버둥 거리는 모습이 볼만하다. 나비나 나방은 의외로 금방 타버려서 시시하다. 나는 나비나 나방은 가루가 날려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실 무서워했다. 특히, 나방 가루는 눈에 들어가면 장님이 된다는 형들의 말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꺼려했다. 벌레 태우기의 최고봉은 사마귀다. 벌레 중의 왕답게 사마귀는 용맹하다. 불의 마왕과 싸우는 용사처럼, 꼿꼿이 서서 두 팔을 휘두른다. 등 속에 감춰둔 날개를 펴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정의는 패배하고 불의 마왕은 사마귀 용사를 삼킨다. 사마귀를 응원하던 악동들은 또 다른 검투사를 찾아 흩어진다.
실컷 놀다 보면 불길은 어느새 잦아들고 나무들은 벌겋게 숯이 된다. 땅거미가 지고 어둑어둑해지면서 그날의 마지막을 장식할 축제가 시작된다. 쓰레기 장에서 주워온 깡통에 구멍을 숭숭 뚫는다. 통조림 캔, 양념통 등이 있지만 최고는 분유통이다. 크기도 적당하고 구멍 뚫기도 수월하다. 깡통 입구에 철사를 꿰어 길게 손잡이를 만든다. 준비는 끝났다. 달궈진 숯들을 깡통에 적당히 채우고 밖에 나가서 돌리기 시작한다. '휭~ 휭~' 깡통이 돌면서 안에 있던 숯들이 불꽃을 일으킨다. 주홍빛 불길이 돌면서 고리를 만든다. 적당한 회전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고수의 자질이다. 너무 느리면 숯이 쏟아진다. 너무 빠르면 놓쳐버리고 만다. 모두가 하나씩 원을 만들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 같이 소리친다. '자~ 던진다. 하나, 둘, 셋!' 마지막 구령에 맞춰 모두들 잡고 있던 철사를 놓는다. 동그랗던 고리가 흩어지고 띠가 되어 비탈을 내려간다. 어둠이 내려앉는 초저녁에 별똥별이 떨어진다. 날아가는 깡통에서 숯 조각들이 부서지며 튀어나온다. 별똥별에서 하늘거리는 불꽃 꼬리가 생긴다. 하루종일 밋밋한 회검색이었던 산비탈에 드디어 살아 꿈틀거리는 불빛이 반짝인다. 누군가는 멀리서 이 광경을 보고 정말 별똥별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그리고 그 누군가는 소원을 빌지 않았을까? 원래 쥐불놀이하고 마지막에 던지면서 소원을 빌곤 한다. 날아가는 불꽃의 모습이 별똥별 같아서 그랬던 것일까?
뒤처리는 필요 없다. 애초에 아무 생명도 없는 돌무더기였기 때문에 흩어지는 숯에의해 불이 붙을 무언가도 없다. 그저 불길이 남아있는 모닥불에 오줌을 누어 꺼버리면 그만이었다.
사진: Unsplash의James Ow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