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레의 시민들, 그리고 노블레스 오블리주
노엘과 플리키뱅의 디스전이 공중파 메인 뉴스에까지 나올 정도로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진중권 교수는 2022년 1월 16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아래와 같은 포스팅을 올렸습니다.
두 래퍼의 디스전이 어떻게 9시 메인 뉴스에 오르게 되었으며, 진중권 교수까지 이에 대해 언급을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사건의 구성
1. 블라세의 디스 to 노엘
쇼미더머니 11에서 블라세가 신세인과 디스 배틀을 했습니다. 배틀에서 블라세는 "신세인 본명은 용준이, 이름부터 위험해 운전은 하지 말길"로 신세인과 노엘을 같이 디스했습니다.
(신세인의 본명은 신용준, 노엘의 본명은 장용준입니다)
2. 노엘의 인스타 포스팅 to 블라세
이에 대해 노엘은 블라세를 저격하며 인스타에 아래와 같은 포스팅을 했습니다.
노엘이 흥분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보는 영향력 있는 프로그램에서 생뚱맞게 디스한 것은 블라세가 선을 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이 있으면 누구라도 너무 화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저급한 공격에 대한 반응은 더 저급했습니다.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블라세에 대한 인신공격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한국인까지 저급하게 공격했습니다.
한국에서 된장찌개 처먹고 산 새끼들
노엘이 쇼미더머니 11 디스전에서 생뚱맞게 공격받았듯이, "한국에서 된장찌개 처먹고 산 새끼들"이라는 표현은 저를 포함한 많은 한국 사람들을 공격했습니다. 블라세는 잘못이 있더라도 된장찌개를 즐겨 먹는 수많은 사람들은 잘못이 없습니다. 매우 안타까운 감정적인 대응이었습니다.
여기서 미셸 오바마가 말한 것처럼 "그들이 저급하게 가더라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간다."를 따랐다면 상황은 180도 달라졌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이 저급하게 가더라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간다."를 행동으로 실천한 아이돌 사례가 있습니다. 최근 BTS의 RM은 사적으로 화엄사를 방문했습니다. 사적 방문을 화엄사는 홍보의 툴로 사용했습니다. 충분히, 화날만한 상황을 매우 품위 있게 대응하여 큰 화제가 되었으며, 역시 RM이라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3. 플리키뱅의 디스 to 노엘
노엘의 블라세를 향한 디스 이후 블라세와 같은 그릴즈 팀이었던 플리키뱅은 딩고 라이징 벌스에 출연해 본인 파트에서 "된장찌개 먹고 자랐지만 음주 운전해 본 적은 없어 bitch"라는 가사로 노엘을 직접적으로 디스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자신의 사이드클라우드에 Smoke Noel이라는 디스곡을 발표했습니다. 사건을 조사하는 마음으로 저는 디스곡을 들었습니다. 역시 저급한 대응이었습니다. 듣기 싫었습니다.
4. 노엘의 디스 to 플리키뱅
예상하셨겠지만, 여기서 사건이 끝날 리가 없습니다. 노엘은 "강강강?"이라는 맞디스곡을 발표했습니다.
듣기 싫었지만 사건을 조사하는 마음으로 노래를 들었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가사는 매우 저급했습니다. 그중 특히 거슬리는 가사가 있었습니다.
전두환 시대였다면 니가 나 건드리면 가지 바로 지하실
노엘의 할아버지는 전두환 정권 시절 집권 국회부의장까지 지낸 장성만 목사라고 합니다. 노엘의 아버지는 윤석열 대통령의 최측근이며 실세라고 불리는 장제원입니다. 노엘 집안의 권력과 재산은 어마무시합니다. 누가 봐도 한국의 지도층입니다. 하지만, 전두환 시대의 지하실은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닙니다. 자신의 위치에 따른 특권 의식을 뽐내려 했다면 크게 잘못생각했습니다.
1987년 1월 박종철 열사가 경찰 고문을 받아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촉발된 학생시위에 참가한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로이터는 그날 '학생 한 명 사망'이라는 제목이 달린 이한열 열사의 사진을 내보냈습니다. 다음날 중앙일보 1면에 이 사진이 실렸습니다. 그다음 날 조간에도 연이어 실렸습니다.
이 한 장의 사진이 불러일으킨 공분은 민주화를 향한 열망을 폭발시켰습니다. 박종철 열사, 이한열 열사, 그리고 민주화 운동을 하다 숨진 수많은 희생자가 있었기에 2023년 대한민국에서는 권력을 비판해도 지하실에 가지 않아도 됩니다.
대한민국의 권력자와 칼레의 시민들(The Burghers of Calais)
제가 프랑스에서 유학했을 때 로댕 미술관(Musée Rodin)을 방문했습니다. 미술관의 정원은 장미꽃으로 장식되어 너무 아름다웠고 평온했습니다. 평온했었던 제 마음은 로댕의 작품 '칼레의 시민들'을 보자마자 흥분하고 감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댕은 피골이 상접해 광대뼈가 두드러져 보이는 조각을 깎는데 5년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 작품의 소재는 1346년 발생한 영국군의 칼레 정령 사건입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작은 항구 도시인 칼레를 쉽게 정복할 줄 알았으나 저항이 강해 오랜 전쟁 끝에 겨우 칼레를 점령했습니다.
화가 난 에드워드 3세는 '칼레 주민을 모두 죽이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주민 몰살 위기에서 칼레의 권력층은 에드워드 3세에게 간청했습니다.
무고한 양민을 죽이지 말아 주십시오.
대신 우리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간청을 들은 에드워드 3세는 "어리석은 저항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 한다. 저항에 앞장섰던 여섯 명은 삭발하고 목에 밧줄을 맨 채 맨날로 찾아와 처형대에 오르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살 수 있다는 안도감과 누군가는 죽어야 한다는 불안이 교차할 때 가장 먼저 부유한 상인 피에르가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고위 관료인 장 데르에 이어 그 아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두 사람이 동시에 지원하여 총 7명이 지원했습니다.
칼레의 권력층이었던 귀족과 부유한 상인들도 긴 전쟁으로 피골이 상접해 있었습니다.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록하기 위해 로댕은 5년 동안 이 작품에 몰입했습니다.
2023년의 대한민국은 더 이상 권력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엄청난 부를 가진 사람을 존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권력과 부를 가진 사회의 지도층에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습니다.
지도층의 권력과 부를 특권으로 생각하면 아직도 전두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2023년 대한민국 국민은 '고귀한 자일수록 먼저 책임을 지는 권력층의 모습'을 기대합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프랑스는 일반 대학은 평준화했으나, 엘리트 양성 기관인 그랑제콜(Grand Ecole)은 철저한 선발 시험을 거쳐 우수 학생들을 뽑습니다. 그랑제콜은 국립행정학교(ENA), 파리정치대학, 에섹경영대학, 에콜 폴리테크틱 등 여러 학교를 모두 포괄합니다.
프랑스는 리더가 희생하더라도 국가를 위해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는 의식이 남아 있습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바탕으로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 전반에서 이 그랑제콜 출신이 엘리트로서 사회를 이끌어 나갑니다.
마크롱 대통령: 파리정치대학 졸업
올랑드: 파리정치대학 파리경영대학 졸업
미셀푸코& 사르트르: 파리고등사범학교 졸업
제가 학교에서 만났던 그레제콜의 많은 프랑스 학생들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강했습니다. 좋은 학교에 다닌다는 특권 의식보다 책임감이 강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제 한국은 세계적인 경제 대국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반도체, 자동차, 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한 산업에서 한국은 최정상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민은 1류, 지도자는 3류라는 말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된장찌개를 많이 먹었던 대한민국 국민은 나라를 위해 희생했고 나라를 지켰습니다. 이에 반해, 지도층은 나라를 버리고 국민을 멸시했습니다.
한국이 화이트 스페이스(아무도 가보지 못한 장소)로 가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입니다. 대한민국의 권력자분들이 특권 의식을 버리고 칼레의 시민들의 반에 반만큼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발휘해 준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를 밝습니다.
대한민국 국민도 권력층을 존경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