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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가본드 Dec 05. 2023

야마시 천하 (山師 天下)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어

맵찔이 꼬마가 있었다. 얼마나 맵찔이였냐면 김치도 못 먹어서 물에 씻어 먹을 정도였다. 하루는 꼬마네가 김장을 했는데 시뻘거무루죽죽한 김치가 무서웠던 꼬마는 김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꼬마의 아버지는 꼬마에게 김치를 먹어 보라고 마구 권했다. 하나도 안 맵다고. 시원하다고. 딱 봐도 되게 매울 것 같은데! 하지만 눈 딱 감고 먹어 보았다. 으윽.. 맵다. 꼬마는 기겁을 하고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고 한숨을 휴우 쉬고는 중얼거렸다.


꼬마 : 흥,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네.

아빠 : 버럭! 어떤 놈이 그따위 말 가르쳤어!

꼬마 : 아빠가요 :P


세월이 조금 흘러 꼬마는 좀 더 컸고, 꼬마의 아버지는 꼬마를 야구장에 데려갔다. 홈팀이 2:3으로 리드당한 상황에서 홈팀의 9회 말 공격. 선두 타자가 2루타를 치고 나갔다. 홈팀 감독은 2루에 발 빠른 대주자를 기용했다. 그런데 이 대주자라는 인간이 나오자마자 투수의 견제구에 꽥 죽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관중석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고, 꼬마는 야구장이 떠나가라 외쳤다.

꼬마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웃겨 본 적은 그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던 걸로 전해진다. 이 꼬마는 자라서 나중에 글쓰기에 뒤늦게 재미를 붙였고, 지금은 컴퓨터 앞에서 '야마시 천하'라는 제목과,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어'라는 소제목으로 글을 쓰고 있다.




다시 그 꼬마. 꼬마가 13살 때의 일이다. 꼬마 어머니가 삼겹살을 사 왔는데, 길게 자른 삼겹살이 스티로폼 팩에 층층이 쌓여서 랩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런데 랩을 벗기니 맨 위층만 그럴듯하고, 그 아래층은 살코기는 적고 비계가 많고, 그 아래층은 살코기는 그보다 더 적고 비계는 더 많고, 그렇게 점점 비계의 비중이 높아지더니 4층부터는 아예 일관되게 100% 비계였다.


꼬마의 어머니는 "에라이 문디 야마시 %$&@" 하면서 삼겹살을 휙 던져 버렸다. 정확히는 슬램덩크의 채치수가 구사하는 고릴라 덩크를 쓰레기통에 꽂아 버렸다. 그런데 야먀시가 뭐지? 하지만 화가 단단히 난 어머니한테 "야마시가 뭐예요?" 했다간 자신에게 불똥이 고스란히 튈 게 뻔해서 꼬마는 물을 엄두도 못 냈다.


세월 지나 '야마시'가 무슨 뜻인지 알아보았다. 사기 정도의 의미로 짐작되긴 하는데 사전을 찾아보아도 그런 뜻은 나오지 않으니, 아마도 속임수를 뜻하는 '다마시(騙し)'라는 말이 들어와 전승되며 '야마시'로 한국화 된 게 아닐까 한다.

야마시(山師)는 원래 화투 용어이다. 화투는 정직하게 치면 재미가 없고 야마시를 쳐야 재밌는데 일제강점기 이후 아예 민속놀이가 된 이 지랄맞은 왜놈 놀이에서 비롯된 야마시 정신은 우리네 일상의 거의 모든 분야를 서서히 잠식하며 그 수법도 갈수록 지능적이 되고 급기야는 대대로 지켜나가야 할 숭고한 정신이 되어 계승발전할 판이 되었으니 이것이 곧 야마시 천하 되시것따.




과자를 사면 애초에 내가 사려던 게 과자였는지 질소였는지 그조차 헛갈릴 정도다. 속 편하게 그냥 에어백을 샀는데 과자가 딸려왔다고 정신승리하자. 하지만 그래도 괘씸하다. 베개로 쓰려고 에어백을 샀는데 왜 과자가 들어있느냐 말이다.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잠을 잘 수가 없잖아. 에라이 이런 야마시...(꽝) 정체불명의 잡상인한테 사는 거면 또 모르겠는데 이름만 대면 다 알 상표의 과자들마저 대놓고 너도나도 야마시를 쳐 대니, 그야말로 야마시 천하가 아닐 수 없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환경부가 과도한 공기주입을 규제하려고 공기가 35%를 못 넘게 기준을 정한다는 기사가 보인다. 2013년 기사인데 10년 지난 지금도 딱히 달라진 건 잘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관련 법령을 자세히 보면 '단, 부스러짐 및 변질을 막기 위해 공기를 주입하는 경우 부풀려진 부분에 대해서는 포장공간 비율을 적용하지 않는다'라는 단서 조항이 있기 때문에 제조사에서 "이거 부서지지 말라고 넣은 거예요. 소비자들을 위한 배려이지요. 어때요, 안 어때요?" 이러면 처벌할 근거가 없으니 사실상 있으나마나한 법이다.


그리하여 나는, 과자로는 먹는 것 말고도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수영장에 가면 코르크나 스펀지로 만들어서 수영 처음 하는 사람들 물에 뜨게 하는 킥판이 있는데 대신 이걸 쓰면 안될까? 위의 과자를 한 봉지 사들고 동네 스포츠센터에 갔다. 과자봉지를 끌어안고 팔을 쓰지 않고 발차기로만 25m 풀의 반대쪽 끝까지 헤엄쳐 가면 성공, 가라앉으면 실패.


휴대폰을 방수팩에 넣어 한 손에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과자봉지를 쥐고, 발로만 수영하며 동영상 촬영을 시도했다. 그런데 미션이 실패했다. 관리인에게 제지를 당하고 만 것이다. 수영장에는 휴대폰이나 카메라 등 전자기기를 가지고 들어올 수 없으며 촬영도 할 수 없단다.



이렇게 나의 성탄 기획특집은 나가리가 되고 말았다. 차선으로 이건 어떨까. 과자 한 1,000 봉지로 보트를 만들어 한강 건너기 도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관할 관청인 서울시 미래한강본부의 허가가 필요하다고 한다. 허가해 줄 것 같지도 않지만 해 준다고 쳐도 신분상 품위유지의무 위반이 될 소지가 다분하니 안되겠군. 그럼 차차선으로 대한해협을 건너 쓰시마 섬까지 가는 건 어떨까. 이건 일본 당국의 허가가 있어야 할 텐데 참으로 퍽도 허가 내주겠다. 뭐야 이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 크흑, 분하다.


대형 마트에서 모둠회를 샀다. 그냥 보면 알 수 없는데, 들어올리고 아래에서 보면 밑바닥이 뚜껑 천장에 닿을 정도로 튀어올라와 있고 실제 내용물은 개미 눈곱만큼도 되지 않는다. 마트까지 이렇다니 정말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구나. 불신의 털이 단단히 박혀서 뭔가 납작한 물건을 살 때는 뒤집어서 바닥부터 체크해야 할 판이니 환장할 노릇이다.

진정 슬픈 것은 많이 못 먹는 게 아니라, 조롱당하는 횟수만큼 커져가는 불신이다.


이번에는 외국 과자다. 동결건조한 브로콜리라고? 맛있겠네. 샀다. 봉지는 흔히 보는 에세이책 정도의 크기인데 안에 들어있는 건 사람 새끼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브로콜리 달랑 4조각에 약간의 시즈닝 가루가 전부다. 혼자 먹었기에 망정이지 누구랑 같이 먹기라도 했다면 되게 민망할 뻔했다.

야마시에는 국경이 없다 (물 건너온 과자)


비트와 월동무로 피클을 만들려고 슈퍼마켓에서 외국산 향신료를 샀다. 라벨지로 교묘하게 내용물의 함량을 가려 놓았다. 속에 얼마나 들었는지 알려면 흔들어서 소리를 들어 보아야 한다. 상품에 대한 정보를 주어야 하는 라벨은 오히려 상품 정보를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만 그런 게 아니라는 이 사실에 웃어야 하는가, 울어야 하는가?

참으로 절묘한 야마시에 경탄을 금치 못한다 (물 건너온 향신료)
이건 최소한 정보는 주니까 야마시에 들어간다고는 하기 어렵군.

식품 정도야 "에잇 퉤퉤, 네놈들 물건 다시 사나 봐라" 하고 쓰레기통에 고릴라 덩크를 꽝 처박으면 그만인데, 가장 좋지 않은 건 건축으로 야마시 치기다. 콘크리트를 만들 때 시멘트와 물의 비율을 일정 이상 유지해야 하는데 건축업자가 원가를 줄이거나 작업을 쉽게 하려고 물을 많이 타고 시멘트를 적게 넣으면 콘크리트가 굳으면서 물이 시멘트를 물고 빠져나간 후 굳은 내부는 골다공증 걸린 사람의 뼈처럼 미세 구멍이 숭숭 뚫려 안에 공기가 차고, 이 상태로 세월이 가며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산화가 진행되는 것이다. 그때는 진동이나 충격에 실금이 가거나 아예 무너질 가능성도 커지지만 건축이란 것의 특성상 일단 콘크리트가 굳으면 때려 부수고 돋보기를 들이대지 않는 한 알아낼 수가 없으니 이걸 악용한 야마시가 횡행하고, 이 대표적 결과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참사이다.




예전에 보던 유튜브 채널이 있었다. 처음에는 유용한 듯해서 가끔 봤다. 그런데 <비법 대방출! 이렇게만 하면 당신도 성공!> <○○에 100% 실패하는 방법!> 이런 식으로 매일 어지럽게 도배된 콘텐츠를 보니 점점 피로감이 커져갔다. 단정적이고 자극적으로 단순화해야 다수의 눈길을 끌 수 있으니 콘텐츠 제공자의 입장에서는 애써 만든 콘텐츠가 묻히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을 거라 짐작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런 식의 제목을 내걸어 놓은 콘텐츠에는 이상하게 신뢰가 가지 않는다.


학습하는 배가본드가 오랫동안 포장만 번드르르한 것에 하도 낚여서 그런 걸까. 겉모습 좋은 게 죄는 아닌데도 그럴듯한 포장을 보면 조건반사적으로 의심부터 먼저 하게 된다. "이거 진짜예요?" 보고도 못 믿는 의심의 말을 달고 산다. 어릴 때부터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어"를 외치며 모두를 믿지 못할 사람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골다공증 걸린 뼈처럼, 그걸 닮은 콘크리트 건물처럼, 관계도 깨지고 무너진다. 나는 그야말로 야마시 천하가 낳고 기른 처량하기 그지없는 인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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