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그라를 먹었다. 구해다 먹은 건 아니고 좀 황당하게 우연한 이유로 먹게 되었다. 어느덧 10년 전이다.
사정은 이렇다. 그때 나는 중국 상하이에서 일하고 있었고, 한국에서 삐장님이(※여기 삐장님의 '삐'는 음소거이다) 행사에 참석하러 상하이를 방문하셨다. 삐장님은 4일 머무르다 돌아가셨고, 바로 다음날 중국 사업장에 삐장님이 수취인으로 된 택배가 하나 날아왔다.
삐장님이 물건을 주문하셨구나. 한국으로 보내드려야겠군. 내용물을 다시 포장하려고 박스를 뜯었다. 웬걸. 비아그라다. 아, 삐장님은 한국에서 비아그라를 사면 비싸니까 여기서 주문하신 거구나. 그런데 삐장님이 귀국하시기 전에 택배가 도착하지 않은 거구나.
삐장님, 비아그라가 왔습니다. 어찌할깝쇼?
한국으로 보내란다. 통관에 걸려 되돌아왔다. 삐장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삐장님은 비아그라를 포기하셨다. 비아그라가 임자를 잃었다. 재미삼아 한 알 까먹어 봤다. 순전 호기심에 한 번 먹어 본 거고 누군가는 내심 기대했을지도 모르는 19금 이야기는 국물도 없다.
쓰다 쓰다 이런 얘기까지 쓴다. 배가본드라는 브런치 작가 놈이 비아그라 먹은 이야기까지 듣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럼에도 이런 썰을 푸는 건 최근 언론 보도 때문이다. 비아그라가 혈관성 치매 예방에 좋다는 연구 결과다. 무려 옥스퍼드 대학 연구진 발표다. 아하! 머릿속에서 전구가 반짝 켜졌다. 인구 감소로 난리가 났는데 그야말로 단비 같은 연구 결과다.
국가가 인구 문제에 막대한 예산을 쏟고도 효과를 보지 못한 건 그게 경제적 문제만을 함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저출생, 고령화라는 말은 정치인들의 경제적 논리일 뿐, 국민 개개인의 행복과는 동떨어져 있다. 낳아서 애국하라고 외칠뿐 개인의 삶은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는다. 정 그런 식일 거면 상대적으로 더 풍요로운 세대가 더 오래 살아남아 더 많은 아이를 낳는 게 차라리 낫다. 치매도 막고 활력도 주는 비아그라를 중년층, 장년층, 노년층에 무상 지급하면 시니어 부부 화목에도 기여하고. 어때, 안 어때? 그렇잖아도 의학의 발달로 노산 기준연령도 계속 올라가는 중이라 하니깐. '아이 낳아라! 애국해라!' 울림이라곤 하나도 없는 이런 구호 말고, 젊은 층의 무거운 짐을 나눠 짊어질 방법부터 먼저 찾아보는 게 도리다.
저출생 대책이라며 나라에서 내놓은 것들을 보자. 한 국회의원은 출산율 저하가 수유로 인한 여성의 가슴 모양 변화 때문이라며 여성의 가슴 성형에 세제혜택을 주는 법안을 발의하고 동료 의원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한 서울시의원은 항문 괄약근에 힘을 주는 케겔 운동을 저출생 대책으로 홍보하고 덕수궁길에서 5주간 케겔체조 행사를 열었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은 여아를 1년 일찍 입학시키면 출산율이 높아질 거란 보고서를 내놨다.
'레이크 워비곤 효과'라는 게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지평이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아이디어는 다 블루오션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게 아예 무슨무슨 효과라는 이름까지 붙어서 존재할 정도로 흔해빠진 현상이라면, 차라리 억지로라도 자기 생각을 의심하는 반성의 거리를 두는 쪽이 역으로 블루오션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건 아닐까?
대책이 나올 때마다 기사는 사람들의 비웃음으로 성지화됐다. 성지순례를 하며 나는 이런 상황에서 기사보다 댓글에 눈이 더 간다. 돌려 까기 댓글들이 워낙 기상천외하고 코믹해서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정말이지 다들 천재들이다.
가끔 TV에서 전문가가 한국인들을 웃을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 비판하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남 웃기는 것도 좋아하고, 남의 말이나 글에 웃는 것도 좋아한다. 하지만 어쭙잖게 전문가 행세를 하는 누군가의 말을 들으면 웃음기가 싹 가신다. 역사적으로 한국인들은 풍자와 해학에 능했다. 문학이든 예술이든 곳곳에 풍자와 해학이 깃들어 뚝뚝 떨어질 정도인데 웃을 줄 모르긴 누가 모른다는 걸까.
SNS의 발달로 풍자와 해학이 발달했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에 반응하던 민초들의 모습만 봐도 그게 아님이 드러난다. 犬糞 食衛(이누쿠소 쿠라에. '개똥이나 처먹어라'), 玄田 牛一(쿠로다 규이치. 세로 쓰기로 바꾸면 일본어 욕설 '畜生[칙쇼]'), 犬子 熊孫(이누코 구마소. '단군의 자손이 개자식이 되었어'), 迪宮 裕仁(미치노미야 히로히토. '히로히토는 미친놈이다'), 田農 炳夏(덴노 헤이카. '천황폐하'와 발음이 같음), 南 太郞(미나미 타로. 그때 조선총독이 미나미 지로(南 次郎)였으니 '내가 총독의 형님이시다') 등등. 당시 조선총독부 직원들조차 처음에는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겋게 되었다가 나중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일하기가 어려웠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풍자와 해학은 위대하다. 견디기 어려운 부정적 감정들을 견딜 만한 것으로 바꿔 주니까. 풍자나 해학에는 뭔가를 긍정적으로 바꿔 주는 기능 외에 저항의지의 표출 기능도 있다. 부당함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날카로운 정신이며, 살아서 파닥거리는 집단 지성이다.
나는 풍자와 해학에 취약해서 진지한 글밖에 못 쓴다. 내가 그걸 못한다는 건 스스로 알아서 무리하게 시도하진 않지만 내가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동경은 늘 있다. 웃음 없인 말할 수 없는 이 시대의 출산율 이야기마저 나는 남들처럼 기지를 발휘해 풍자나 해학을 못하고 이렇게 진지+진지+진지하게 할 수밖에 없는 내 현실이 어쩐지 아쉽다.
다시 아까 그 비아그라 이야기. 그때 함께 일했던 직원 한 명과 얼마 후 안 좋게 결별했는데, 비아그라 한 박스도 그때 같이 사라졌다. 그 직원하고 사이 나쁘지 않을 때 반띵 하지 않은 게 후회된다.
하지만 내가 지금 이걸 제안하는 건 한 아름에 가득 품을 정도로 많은 비아그라를 고작 한 알 빠그작 까처먹고 몽땅 날아가 버린 10년 전 일이 지금도 못내 아쉬운 그런 옹졸한 이유에서가 아니다. 이건 구국의 결단이고, 나는 사뭇 진지하며, 내 아이디어는 앞에 예시한 그런 날품팔이식 정책들과는 다르다. 이건 자그마치 옥스퍼드 대학 연구가 근거란 말이다. 과학이 인류를 구원하리라. 늦둥이 군단이 대한민국을 구원하리라. 출산율 1.0이 무너진 게 불과 7년 전인데 0.9도 0.8도 무너지고 이젠 0.72라 하니 더는 시간이 없다. 그러니깐 하루빨리 비아그라를 전면 무상보급하자.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