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등감 부자 1
환자를 집에 어서 보내드려 보아요.
사람의 열등감이란 지위와 장소를 막론하는 것 같다. 못 배우고 못 가진 사람만의 것이 아닌,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열린 감정이다. '저 사람 왜 저러지?'의 가장 밑바닥에는 항상 열등감이 있다. 그것은 *네펜데스에 발을 담그게 된 개미나 쥐와 같아서 한 번 발을 헛디디기 시작하면 빠져들어 영영 헤어나올 수가 없는가보다.
식충식물 네펜데스, 열등감의 주머니
수년전 아이를 키우며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주님의 사랑이 충만한 (브런치 북 [그 해, 우리 치과에서는], '순둥이 원장님') 곳에서 종교없는 내가 CCM을 따라 부르며 잘 적응하고 있었지만, 파트타임이 내 직업에서의 목적달성은 아니었기에 나는 실장 자리가 나온다면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느 날, 같이 일하던 똑똑한 코디네이터이자 간호조무사인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실장님, 여기 난장판이에요. 와서 교통정리 좀 해주세요. 여기 진짜 말도 안돼."
오픈한지 몇달 되지 않은 곳, 그런데 실장을 구한다? 말도 안 되고? 의심과 현실이 100% 일치할 상황이라 거르고 가는게 맞지만, 내가 필요하다지 않은가! 그럼 또 내가 고민없이 등장해야 한다. 바로 다음 날 나는 면접을 보았다.
건물의 한 층을 다 쓰는 굉장히 넓은 치과였다. 유니트(치과에서 환자가 눕는 치료의자)가 대략 보아도 15대는 넘어보였고(보통 작은 개인 치과의 경우 3~4대의 유니트가 있다.) 그에 걸맞게 직원들의 수도 참 많았다. 규모는 마음에 드네. 근데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는 뭘까. 대기실에도 진료실에도 환자가 꽉 차있고 회전이 되지 않아 진료실에 들어오는 환자도, 대기실로 나오는 환자도 없는 그런 이상한 공기. 유니트가 많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무리없이 착착 돌아가지 않는 답답함이 한 눈에 보였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입술이 너무 빨간거 아니에요? ㅎㅎ"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지?
대표 원장님이 이런 식이면 또 마이너스다.
"네, 빨간 입술을 좋아합니다."
"언제부터 일할 수 있어요?"
내 스스로 온것이라면 이런 무례함은 바로 면접 포기지만, 좋아하는 동생의 부탁이 아니던가. 나는 우선 출근해보기로 했다.
1. 숨은 직원 찾기
넓은 ㅁ자 모양의 치과는 어디에든 숨어들기 최적화된 구조였다. 치위생사실이든 회복실이든 상담실이든, 어차피 직원도 많아 숨어있겠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종일도 그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출근 첫 날, 분명 나와 인사한 직원들은 8명도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이 넓은 진료실에 있는 사람은 기껏 2~3명 뿐이다. 데스크에 2명, 그럼 나머지 최소 4명 이상의 직원들은 어디로 간거지?
치위생사실. 한 명 포착. 선생님, 나오셔서 스켈링(치석 제거) 합시다!
제2 상담실. 한 명 포착. 선생님, 드레싱(간단한 소독) 환자 앉힐테니 얼른 봅시다!
회복실 침대와 소파. 두 명 포착. 선생님, 한 분 파노라마(치아 전체가 나오는 방사선 사진) 찍어 주시고, 한 분 프렙(치아 보철 치료를 위해 치아를 깎고 본뜨는 치료) 환자 봅시다!
한바퀴 돌고 왔는데도, 1분이면 끝날 간단 소독 환자가 20분 전부터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그대로 치료의자에 방치되어 계신다. 간단한 소독 환자는 원장님 확인 하에 얼른 하고 내려보내고, 다음 환자를 불러 앉혔다. 다음 환자를 불러 방사선 사진을 찍었다. 다음 환자를 불러 스켈링을 시켰다. 아니 이게 뭐야. 다들 뭐 환자를 유니트에 전시해 두는거야? 왜들 환자를 빨리 회전시키지 못하지? 참, 맞다. 그래서 내가 여기 온거지.
환자와 직원을 배치시키고, 나는 신환 상담을 위해 예진실로 향했다.
2. 상담하는게 제 일인데요.
두 분의 원장님이 계셨다. 조금 이상했지만 페이 원장님 (월급을 받는 의사. 자신의 이름으로 신고된 병원이 아닌 곳에서 직원으로 일한다.) 이 경영을 맡고 계셨다. 페이 원장님과 나는 꽤나 손발이 잘 맞았다.
"실장님 오시니까 이제야 좀 돌아가는 것 같네요. 사실 좀 답답했어요."
페이 원장님과 시간이 날 때마다 어떤 식으로 이 넓은 치과를 운영해 나갈지 회의를 했다. 그러나 대표 원장님(본인의 이름으로 신고된 병원의 원장님, 사장님)은 관심이 없는건지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예진실에는 대표원장님이 신환을 진단하고 있었다. 진단을 마치고 내가 환자를 모시고 상담실에 가려는 순간, 대표 원장님은 말했다.
"됐어요. 내가 할거니까 다른거 해요."
"? 알겠습니다."
대기실에만 환자가 10명이 넘게 기다리고 있고, 진료실에도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가 좌르륵 앉아계신데 치료를 담당해야할 *치과의사가 상담을 직접 하겠다고?
(*치과의사가 상담을 직접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다리는 환자가 몇 안되거나, 유니트가 15대나 되는 이 곳에 치과의사가 열 명쯤 된다면. 그러나 숨어 있기 좋을 정도로 이렇게 규모가 크고 환자가 밀려있는 곳에서 단 두 명의 치과의사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치과의사가 진단을 내리고 간단한 설명을 해주면, 그 다음은 실장이 진단을 토대로 치료기간, 비용, 주의점, 전신질환 약 확인 등의 자세한 내용을 설명하게 된다.)
직접 상담을 하겠다는 대표원장님은 상담실에서 1시간이 지나도 나오질 않는다. 환자는 무작정 기다린다. 대기실에는 환자가 더 많아진다.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닌지 페이원장님은 얕은 한숨과 함께 표정이 안 좋아진다. 혼자서 15대나 되는 치료의자에 앉은 모든 환자를 해결해야 하니.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페이 원장님께 보고하고 직원들 선에서 가능한 처치를 하고 환자를 보내드렸다. 환자들은 저마다 아유, 오늘은 빨리 끝나서 좋네, 하시며 간다.
3. 임시치아나 깎아요.
3일 째 되는 날부터는 대표원장님의 열등감이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어제처럼 놀고 있는 직원을 데리고 와 이것 시키고, 저것 시키고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는데 갑자기 대표원장님의 호출이 있었다.
"김실장은 네번째 환자 임시치아나 깎아요. 쓸데없는 일 하지 말고."
"? 네, 알겠습니다."
쓸데없는 일? 표현하고는. 깎지 뭐, 임시치아.
5분 후, 나는 임시치아를 다 깎고 일어나 내 할 일을 했다.
"다 깎았어요? 왜 돌아다녀요?"
"네, 다 했는데요."
그곳은 저연차들이 많은 곳이라, 임시치아 하나를 1시간씩 깎고 있었다. 나는 출근 첫 날 "**선생, 예술작품을 하는게 아니라, 임시치아를 깎는거에요. 시간을 단축해야 돼요." 하고 여러 선생에게 지적한 적이 있었다. 임시치아 하나 제작하는 것은 5분이면 된다. 대표 원장님은 진료하다 말고 굳이 와서 내가 깎은 임시치아를 이리저리 확인까지 한다.
"......알았어요."
뭔가 씩씩거리는 듯한 원장님의 태도가 보였다. 부자이시구나, 열등감 부자. 너 두고 보자, 하는 환청같은 것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ㅡ 열등감 부자 2 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