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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몽도리 Dec 28. 2024

토북이 이야기(17)

할머니를 만난 토북이

  토북이는 주로 햇빛을 피하기 위해 굴이나 돌 아래 몸을 숨기며 밤에 열심히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어왔다. 토북이는 그걸 자신만의 작은 결승선이라고 했고, 호랑이 사건 이후 유명해진 토북이의 이야기는 일파만파 퍼져 작은 동물들부터 큰 동물들까지 자신들만의 공간, 즉, 작은 결승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전부터 작은 결승선을 잘 가꾸고 있었던 동물들은 이 소식에 반가워했고, 관련된 강의도 하기 시작했다. 토북이는 자신의 영향이 이렇게 커질지 모르고 얼굴을 붉혔고, 이런 호재를 접하게 된 토북이의 부모님은 자랑스러워하셨다. 하지만 토북이가 살면서 지금까지 만들어왔던 결승선 중 반 이상은 호랑이와 승냥이, 늑대 패거리에 의해 사라진 후였고, 그 후에 만든 작은 결승선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토북이는 너무 속상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으며 새로운 길에 집중하려 했다. 하지만 나아갈 때마다 모래바람을 만나 계속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든 토북이는 또다시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이제는 자신의 눈물을 다른 동물들에게 들키고 싶지도 않았다. 

   다들 자신을 알아볼까 싶어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토북이는 숨죽여 울며 등딱지 안으로 들어갔다. 평생 그 안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저번의 경험으로 알게 된 토북이는 마음만 타들어갈 뿐이었다. '부모님이 내가 이러고 있다는 걸 아시면 무척 속상해하시고 또 실망하시겠지...' 등딱지 안에서 눈물을 말리고 고개를 빼꼼 내민 토북이는 익숙한 얼굴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가, 왜 이렇게 눈가가 부었어?" 토북이는 할머니를 보자마자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할머니..." 토북이의 외가 할머니 토끼는 토끼들 중에 가장 느린 토끼였다. 그 바람에 허구한 날 토북이 엄마와 싸우고 혼자 속상해하셨다. 토북이는 할머니께 안기며 울었다. "할머니... 자꾸 모래바람 때문에 되돌아오고 말아요." 한참을 울던 토북이는 눈물을 닦고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머니는 어쩌다 여기 계세요? 저 앞에 가 계신 거 아니셨어요?" 그러자 할머니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가기 싫어서 돌아왔다." 이에 토북이가 놀라며 말했다. "정말 열심히 뛰어가셨잖아요. 혹시 호랑이, 승냥이 떼들이 할머니의 길도 파괴했어요?" 

   할머니는 고개를 저으며 토북이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디 당한 동물들이 한 둘 이겠니. 그 결승선들은 새로 만들면 그만이야. 사라져도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으니까. 할머니는 말이다, 큰 결승선의 끝에 가면 갈수록 두려워졌단다. 왠지 한 개씩 지나갈 때마다 내가 사라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생겨. 내 경주가 끝이 나면 어쩌지, 너희들을 보지 못하고 완주해 버리면 어쩌나 이런 고민들로 잠도 못 자고 일부러 천천히 가다가 다시 돌아와서 새 출발을 하려 한단다." 할머니는 토북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로 말했다. "토북이 너는 어릴 때 느리다고 많이 속상해하면서 또 열심히 포기 안 하고 나아갔지. 멀리서 소식을 들으니 아주 훌륭한 일을 했더구나. 네 안에 있는 용기를 끄집어낸 것만으로도 이 할미는 자랑스럽단다. 물론 네가 만들어 온 길이 망가져서 속상하기도 하고, 모래바람 때문에 자꾸만 원점으로 돌아가 조급하기도 할 게야. 하지만 원래 그런 게 사막의 경주란다. 나를 보렴, 나도 토끼 중에서 가장 느린 토끼여서 허구한 날 네 엄마랑 싸우고 고독하게 살아왔어도 이제는 더 빨리 가기 싫어서 다시 돌아오는 걸. 이 경주에 정답은 없단다. 정답이 있다면 그건 네가 만들어 나가는 거야. 마음 깊은 곳에선 너도 알고 있지 않니."

   이에 토북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알고 있어요. 그래도 작은 결승선만 만들면 안 되고 큰 결승선을 향해 나아가야 하잖아요. 근데 앞으로 못 나가겠어요." 이에 할머니가 물었다. "아가, 뭐가 두려운 거니." 이에 토북이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할머니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만든 작은 결승선들이 너무 초라해 보이고 만들어도 절반 이상 사라졌고, 모래바람은 불어와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고, 이런 걸 제 힘으로 멈출 수가 없어요. 나아가다 또 주저앉을까 봐 두려워요. 지금도 주저앉은 걸지 모르겠고요." 이에 할머니가 말했다. "아니, 너는 주저앉지 않았단다. 나아가고 있는 중이란다. 나아가다가 힘든 시기를 맞이한 거야. 누구나 그런 시기가 있단다. 나도 그랬고, 네 부모도 그랬고, 네 오빠도 아마 지나온 과정일 거야. 계속 나아가도 막혀서 아무리 가도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을 때, 너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에 토북이가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쉬었다 가거나 그냥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에 할머니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너만의 관점으로 이 문제를 바라보렴. 이 경주는 답이 없으니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가든 네 선택이자, 자유인 거야. 불의를 저지르지만 않고 바르기만 하면 돼."

    이에 토북이는 결승선에 가다 말고 자신과 가족들을 만나러 돌아온 자신의 할머니를 한 동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결심한 듯 말했다. "돌아서 갈래요, 저만의 지름길, 아니, 빠르지 않아도 저만의 지도를 만들 거예요. 제가 원하는 곳을 가고 그러다 큰 결승선을 지나면 그때마다 행복해하며 경주를 재밌게 하고 싶어요. 그 방법을 써보고 다시 나아갈 수 있게 되면 직진도 하다가 꺾기도 하다가 돌아가기도 하고, 부모님과 형제를 다시 만나러 가기도 할래요." 이에 할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맞아, 네가 원하는 게 그거라면 그게 답이란다. 그 답이 잘 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어. 그에 따른 결과는 어떻든 받아들이면 돼.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 토북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할머니와 함께 가족들을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이때까지 온 길을 돌아가야 했지만 토북이는 자신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고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반대방향으로 간다고 도태되는 게 아니었다. 그러다 토북이는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할머니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던 토북이는 자신이 만들던 작은 결승선들과 엄마가 만들어온 작은 결승선이 함께 있는 걸 발견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다 사라졌을 텐데..."

   이에 할머니가 말했다. "돌아간다고 도태되는 게 아니지. 나는 되돌아오면서 너희가 만든 길을 따라 걸었단다. 너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마음이었는지 알 수 있는 시간이었어. 그래서 소중히 하고 싶었지. 우리 가족의 길들을 복원하기로 마음먹자 돌아오는 길이 너무 행복했단다. 특히 네가 만든 꽃길은 정말 황홀했어. 이 할미가 네가 참 고맙단다. 토북아, 망가진 길도 길이란다. 흐트러진 결승선도 결승선이고, 되돌아오는 경주도 경주인 거야." 이에 토북이는 눈물을 흘리며 할머니를 안았다. "으아앙, 할머니..." 할머니는 가만히 토북이를 토닥토닥 안아주셨다. 자식들과 손주들이 만들어온 길을 지켜주고 계셨던 할머니, 그녀는 그 모든 길을 기억하고 소중히 보관하려 애쓰셨던 것이다. "내가 사실 네 엄마한테는 미안한 게 많아. 어릴 때부터 큰 결승선만 빠르게 빠르게 지나가라고 가르쳤거든. 그게 그 아이에게는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 근데 그 애가 다 크고 네 엄마가 되어서 나랑 똑같게 하는 것을 보고 깨달았지. 아무리 큰 결승선을 많이 지나가도 그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걸 말이야. 나는 네 엄마에게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못했단다."

   토북이는 자책하는 할머니께 말했다. "아니에요, 저는 그런 엄마 밑에서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잖아요. 할머니, 엄마, 아빠, 오빠, 그리고 막내 모두가 저를 도와준 결과예요. 엄마는 아직도 경주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제는 작은 결승선의 소중함도 깨달으셨어요.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자신의 행복을 희생하지 않으실 거예요. 제가 자식으로서 그걸 책임지겠어요." 이에 할머니가 토북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이구, 우리 손녀가 참으로 효녀구나. 하지만 굳이 책임까지 질 필요는 없단다. 네 엄마 경주는 네 엄마의 것이고, 너는 일단 네 경주에 집중해야지. 빨리 다들 만나고 싶구나. 내가 나이가 들었어도 만나러 가는 데는 아무 문제없다." 밝아 보이는 할머니의 인자한 미소에 토북이는 힘이 나는 듯싶었다. 모래바람이 불어오자, 토북이와 할머니는 뒤로 돌아서 모래바람이 이끄는 대로 날아갔다. 그러자 익숙한 길이 보였고, 돌아가는 데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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