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Women. 12 Pairs of shoes. 12 Stories.
공산주의 국가에서 신발을 포함한 모든 상품은 쇼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냥'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단어에 금새 익숙해졌다. 몇 년간의 사냥 끝에 마음에 드는 신발을 찾는다는 것은 사실 매우 신나는 일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자유롭고 민주적이며 번영한 나라에서 성년을 맞이하셨다. 공산주의 아래서 상황이 악화되는 걸 보면서도 조국을 사랑하라고 우리들을 가르치셨다. 나는 그곳에서의 내 삶을 사랑했고, 상점에서 원하던 물건을 사지 못하거나 가끔 음식을 먹지 못하는 것은 결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우리에겐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도 부모님께서는 집에서 들은 이야기는 공개적으로 바깥에서 하지 말라고 가르치셨다. 그렇지 않으면 정치범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책장 뒷줄에 숨어있는 어떤 책들은 낯선 방문객이 오면 빨리 숨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유로운 나라에 산다는 것은, 여러분이 항상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가 실제로 무엇인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모든 장소 구석구석에 정보원이 있어서 사람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무서워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가장 두려웠던 때는 1950년대였다. 내가 10대였을 때인 60년대에 상황이 개선되어 철의 장막이 약간 열렸고, 사람들은 해외로 여행을 갈 수 있었다. 남편과 나는 1967년에 결혼했고 신혼여행을 영국을 히치하이킹하며 보냈다. 우리는 그곳에 머물면서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조국에 대한 새로운 희망이 있었다. 우리 모두가 더 많은 자유를 향한 큰 변화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소련은 자유를 원하지 않았고 1968년 여름 그들은 수천 대의 탱크와 군인들과 함께 우리의 작은 나라를 점령하기 위해 국경을 넘었다. 다른 나라들은 공포에 질려 지켜봤지만, 그들 중 누구도 감히 사나운 늑대 같은 러시아인들에게 맞서지 못했다. 그들이 감히 도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이민자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하는 것이었다. 모든 희망을 잃은 체코슬로바키아 사람들은 수천 명씩 달아났다.
우리는 학교에서 서구의 많은 사람들이 다리 밑에서 잠을 잔다고 배웠고, 공산주의 국가보다 그들의 삶이 더 힘들다고 알고 있었다. 나는 공산당들의 거짓 선전을 하나도 믿지 않았지만, 이민을 가면 돈도 없고, 직업도 없고, 외국에 친구나 친척도 없으니, 실제로 다리 밑에서 자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평생 태어나 자란 조국과 사랑하는 남은 가족을 떠나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남편과 나는 아이들을 원했고, 우리 아이들만큼은 거짓 선전 없이 자유로운 나라에서 자라길 바랐다. 우리는 결국 캐나다로 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캐나다에서는 따뜻한 부츠가 필요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구두 사냥을 갔는데 운이 좋아서 원하던 부츠를 금방 찾았다. 그 부츠는 아름답고, 털이 줄지어 있고, 매우 따뜻하고, 매우 비쌌지만,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체코 크라운은 우리나라 밖에서는 가치가 없어 해외에 가지고 갈 의미가 없었다. 삼촌은 우리에게 미국 돈 50달러를 주셨고, 나는 그 돈을 새 부츠 밑창에 숨겼다. 마침내 우리는 프라하에서 스톡홀름으로 가는 비행기에 탑승했다. 직항기로 예정돼 있었는데 비행기가 동베를린에 불시착했고 모든 승객들은 내려서 검문을 받아야 했다.
비행기 앞에는 군인들이 줄지어 서 있었고, 총은 우리 신발을 겨누고 있었다. 우리는 둘 다 우리가 해외에 머무를 계획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들이 비행기를 멈췄다고 믿으며 떨고 있었는데, 그것은 명백한 반역행위였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린 후,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비행기로 돌아갔다. 그들은 분명 다른 사람을 찾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스톡홀름에서 3개월 동안 머무르며 우리가 꿈꾸던 나라인 캐나다가 우리를 받아줄 때까지 그 부츠를 신고 다녔다. 다행히 캐나다에 망명 후, 우리 둘 다 2-3주 안에 직업을 구했고 그 이후, 내가 원하는 어떤 부츠든 살 수 있는 돈이 생겼지만, 나는 그 소중한 부츠를 15년 동안 아껴 신었다.
이 스토리는 워크숍에 참가했던 친구들의 이야기를 허락을 받고 번역해서 올리는 글입니다.
간단한 글쓴이의 소개를 남깁니다.
작가 소개 Dana Roman
다나는 소련군이 캐나다에 진입한 직후인 1969년 공산주의 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캐나다로 왔다. 그녀는 그 후 20년이 지나서야 체코의 가족을 다시 방문할 수 있었다. 다나는 건축가, 섬유 디자이너로 오랫동안 일해왔으며 20년 전 캔모어로 이사하여 '캔모어 마켓의 스포트라이트 온 더 아트 어워드' 등 많은 상을 수상하며 현재 전업 스튜디오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그녀의 세 폭의 '더 리버'는 캔모어 시청의 의회 회의실에 걸려 있다. 그녀에게는 세 명의 자녀와 다섯 명의 손녀, 손자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