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철쭉의 바다
한라산은 육지 사람들에게 쉽사리 접근할 수 있는 산이 아니다. 그것은 남쪽 끝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섬에 위치할 뿐 아니라 어렵게 짬을 내었다가도 안개, 비구름에 싸여 정상 부근의 실체는 보지 못할 경우가 많아 처음부터 갈 엄두를 내기 또한 어렵기 때문이다.
한라산(漢拏山 1,950m)은 국토의 최남단에 자리하나 남한 땅에서는 가장 높이 솟은 산이며, 나로서는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산 중에 마지막으로 찾게 된 산이었다. 가보고 싶은 욕심은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벼르기만 하다가 전혀 우연한 기회에 이 산을 오르게 된 것이다. 생각지도 않고 있는데 작년 6월 초 연휴를 당하여 작은 처남이 일가권속 15명의 제주도 가족여행을 계획하고 항공편이나 숙박 등 일체를 도맡아 주선해 놓은 상태여서 용단을 내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한라산 등정을 결행할 기회가 온 것이다.
한라산은 철쭉꽃 필 무렵이나 겨울 설화를 겨냥하여 찾는 것이 금상첨화라 하겠는데 마침 이때가 철쭉 철이었다. 장도를 앞두고는 비가 오락가락하여 염려스러웠으나 막상 산에 오를 때는 쾌청하여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리는 기분이었다. 특히 별다른 등산 준비 없이 운동화 차림으로도 산행을 원만히 끝낼 수 있었던 것은 기상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커다란 삿갓을 바다 한가운데 엎어놓은 것처럼 제주도 전체가 한라산 하나로 되어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남한에서는 가장 높은 고도의 산임에도 불구하고 산세의 완만함으로 인하여 섬 어느 곳에서 바라보아도 정상이 그다지 높게 느껴지지 않는다.
한라산을 최단 거리로 오르는 영실코스의 산행 기점인 휴게소의 해발이 1,280미터. 여기서 정상인 백록담까지 이정표에 표시된 거리는 5.7킬로에 불과하나 걸리는 시간은 4시간가량으로 다녀오기가 쉬울 듯하면서도 결코 만만찮은 것은 워낙 거대한 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찻길이 끝나는 지점, 더 자동차로는 나아갈 수 없는 휴게소에서 동굴 속 모양의 터널 숲으로 등산로가 이어진다. 이곳에 들어서자 미지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 설렘이 가슴 속 깊은 곳으로부터 조용한 파문을 일으킨다. 숲속을 지나며 계곡을 건너고 바로 이어진 급경사의 언덕에 올라서자 건너편 오백나한 상의 모습이 휴게소에서 올라볼 때와는 다른 위치여서 새로운 멋으로 늘어선 양상이다. 뒤쪽으로 시야가 훤히 트이며 바다를 향하여 일망무제로 펼쳐진 산자락의 전망이 유별나게 시원스럽다.
여기서부터 기대했던 철쭉꽃 무리가 간간이 눈에 띈다. 단애(斷崖)의 병풍바위 상단을 지나며 좍 깔리다시피 한 구상나무들이 성큼 다가선다. 구상나무숲을 통과하여 왕소나무들이 몇 그루 서 있는 언덕 모퉁이를 넘어가자 갑자기 밝게 바뀌는 대형 스크린의 한 장면처럼 윗세오름의 지천으로 피어있는 철쭉화원이 바다와 같은 망망함으로 시야를 꽉 메운다.
싱그러운 연두, 진초록의 넘실대는 바닷물 위로 몽환의 분홍빛 철쭉 물결이 겹겹의 파상을 이루는 듯하다. 완만한 능선, 능선이라기보다는 평원 같은 산자락을 따라 아래쪽으로 저 멀리 아득히 눈길을 따라 보내면 그 끝에 정작 있어야 할 바다는 낮게 깔린 구름으로 인하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 사이의 초원에 무수한 꽃들만 끝없이 그야말로 광대무변으로 난만하게 널려있어 철쭉의 대해라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소문난 철쭉을 찾아 큰 산을 따라간 적이 두어 번 있다. 한번은 85년 5월 말경 소백산을 철쭉 철에 맞춰 찾았으나 기대와 달리 아직 꽃망울이 터지지 않았었다. 90년 6월 초에 오른 지리산 세석고원에는 2,3일 전 쏟아진 폭우에 꽃잎들이 모두 떨어져 짙푸르러진 나뭇잎의 싱그러움으로 꽃을 놓친 허탈감을 채워야 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가장 보고 싶었던, 그 염원이 언제 실현될지 막연하던 한라산의 철쭉 구경을 부지불식간에 하게 되었으니 세상살이란 어렵게 여기던 일들도 쉽게 풀리기도 하는구나 싶다.
드물게 잡히는 황금연휴의 하루, 명산임은 물론 영산(靈山)이라 할 한라산 길이 호젓하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과욕이요 허욕이다. 명산 영봉(靈峯)은 애호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민족의 산, 또는 대중을 위한 봉우리라 할 수 있어서 한적한 이미지와는 오히려 걸맞지 않을 것 같다. 겹겹의 줄을 이루는 인파가 민족의 대이동을 연상케 하며 산정을 향하고 있는 모습. 마치 국토의 가장 높은 곳, 그래서 성스러움이 감도는 산 위에 올라 일신의 소원성취와 국태민안을 기원하려는 장엄한 행렬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수많은 인파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들어, 서로 무관하게 지내다가 여기서 한번 스치고는 또 제각각 흩어져버릴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면식 있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란 예감이었다. 그래서인지 몇몇 아는 사람을 우연히 만나 반가움을 표하기도 했다. 지기(知己)를 멀리 떨어진 곳, 낯선 땅에서 만났을 때의 반가움은 각별하다.
높은 산에서는 기상이 돌변하는 수가 있어서 산행할 때 옷차림이나 장비가 미흡하면 갑자기 닥치는 위험에 직면하여 속수무책이기 쉽다. 그러나 이날만은 그런 염려를 접어둬도 될 만큼 확실하게 좋은 날씨이다. 대열 중에는 운동화는 물론 일상의 구두를 신었거나 철부지 어린아이를 동반한 배짱 좋은 어른들도 끼어있다. 산정을 향하여 안간힘을 다해 무거운 걸음을 떼어놓는 모습, 자주 눈에 띄었으며 너무 힘들어 도중에 두 다리를 쭉 뻗고 널브러지듯 주저앉아 깊은 한숨을 몰아쉬는 몸집 좋은 젊은이, 실신하다시피 하여 주위 사람들을 애타게 하는 부인네도 있었다. 이들은 모두 내일 죽도록 앓는 한이 있더라도 오늘 정상에 기필코 올라 일생에 한때 한라산 꼭대기에 섰던 일을 자랑삼으려는 일념에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한라산은, 산행의 경험이야 있든 없든 우리나라 최고봉이라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한 번쯤 와보고 싶고 또 그럴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철쭉이 너른 고원에 온통 만발하여 그 아름다움이 환상의 바다를 이루는 이 찬란한 계절임에랴. (9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