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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동몬 Feb 09. 2023

그녀의 방 보다 작은 10평짜리 신혼집

서울의 원룸에서 시작한 신혼생활

앞선 이야기



우리가 구한 신혼집은 서울 중심가의 10평짜리 오피스텔 원룸이었다.

친정의 자신의 방보다 작은 집에서 살게 된 아내에게 참 미안했지만 아내는 상관없는 듯 했다.


나는 일찍 자고 아침 일찍 출근하는 편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6시 반에 출근하여 퇴근하고 돌아오면 빨라도 8시는 되었다. 그리고 10시가 되면 잔다. 아내는 아는 사람 없는 서울에서 임신한 몸으로 그 좁디좁은 10평짜리 집에서 나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입덧이 심해 어디 가지도 못 했다.


나에겐 서울에 사는 이모가 있다.

이모는 23살 어린 나이에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결혼하여 이모부와 서울에 올라왔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에서 이모의 타지 생활은 시작되었다. 가끔 어머니와 우리 형제가 서울에서 며칠 머물다 내려가면 이모는 서울역 플랫폼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아직도 차창 밖으로 보이던, 손을 흔들며 울던 이모 모습이 생생하다. 당시엔 휴대폰도 없었고 집 전화도 시내전화, 시외전화로 나뉘어 시외전화 요금이 꽤나 비싼 편이었다. 가장 빨랐던 기차는 새마을호였고 비행기는 비싸서(저가항공이 없었던 시절) 타고 다니지도 못 했다. 이메일이 있던 시절도 아니고 편지를 주고받던 시절이니 이모가 얼마나 외로웠을지 상상이 된다.


어머니는 나를 낳고 심한 우울증을 앓으셨다고 했다.

자신도 육아가 처음인지라 스트레스가 심각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지금도 잠이 많으신 편인데 육아 때문에 정말 힘드셨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가 우울증을 앓게 되면서 자살하려고 약국에 가서 약을 사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몇 번 있었기에 나는 아내가 외롭지 않도록 평일엔 퇴근하고 와서 함께 산책을 하고 주말엔 아내를 데리고 서울 시내에 놀러 가거나 교외나 지방으로 여행을 가기도 했다. 입덧이 심해 항상 검은 비닐봉지를 가지고 다녔다.


아내는 친정에서 단 한 번도 밥을 하거나 설거지를 해본 적이 없었다.

K장녀의 포스라고 할까. 집에선 거의 황제(?)였다. 장인, 장모님은 아무것도 못 하는 애가 결혼해서 밥도 못하고 설거지도 못 하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하셨다. 결혼하기 전 밥하는 것과 반찬 하는 법을 가르치려고 했었는데 임신하면서 그것 마저도 못 하게 되었다. 한 번은 장인, 장모님이 차 트렁크에 밑반찬과 음식을 가득 싣고 서울로 올라오시기도 했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으니, 아내는 사실 엄청난 요리사였다.

10평짜리 오피스텔 그 좁은 곳에서 매일 요리를 연구했다. 그리고 내가 퇴근하여 집에 도착할 때쯤 요리를 다 만들어 두었고 예쁘게 플레이팅도 했다. 음식도 맛났다. 처음 요리해 보는 것 치고는 엄청난 고수였다. 나는 매일 사진을 찍어 처가식구들이 있는 단톡방에 보냈고 다들 환호성을 질렀다. 자기네들은 지금까지 속고 살았다나.



아내는 약 3개월 정도 입덧을 심하게 했다.

뭔가를 먹으면 항상 토했다. 배가 고프니 또 먹었고 또 토했다. 나중엔 너무 힘이 없어 아이스크림만이라도 먹었는데 그마저도 토했다. 보는 내가 힘들었다. 우리는 결혼 전 아이 셋을 낳자고 했건만 아내가 너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셋은 못 낳겠다는 생각 할 정도였다. 나는 아이가 태어나면 엄마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꼭 이야기하리라 다짐했다.


10평짜리 오피스텔은 시설이나 뷰나 여러 면에서 참 좋았지만 정말 안 좋은 것 한 가지가 있었다.

바로 측간 소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층간 소음이 많다고 하지만 측간 소음도 정말 힘들었다. 옆집에 홀로 사는 남자의 통화 소리까지 다 들렸고 가끔 여자친구인지를 데리고 왔는데.... 그 정도로 방음이 되지 않았다. 그가 가끔 주말 저녁에 친구들을 데리고 와 술을 마실 때 블루투스 마이크로 노래를 불러댔는데 정말 콘서트장이 따로 없었다. 이야기해도 소용없었다.


출산을 3달 정도 앞두고 우리는 더 넓은 집을 알아보자고 했다.

10평짜리 원룸에서는 도저히 아이를 키울 수 없을 것 같았다. 최대한 회사에서 가까운 곳으로 구하려고 했는데 가격은 비싸고 집은 너무 좁았다. 돌아다니는 곳마다 내가 원하는 가격대의 집은 정말 형편없었다.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서울살이는 참 쉽지 않았다.


나는 부동산 폭락론자였기에 집을 매매할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아이 둘 있는 선배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그는 경기도의 전셋집을 살면서 매번 이사를 다니다가 아이들은 커가는데 이렇게 계속 이사 다닐 수는 없다는 생각에 집을 매매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들은 뒤 마음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래저래 알아본 후 아내에게 우리가 매매할 수 있을만한 금액의 집을 알아보자고 했다.


우선 지하철 라인을 따라 우리가 원하는 가격대를 찾아보았다.

당시 부동산 가격이 전국적으로 갑자기 올랐던 상황이었고 서울 부동산은 평균 10억이 넘었다. 지하철 라인을 따라 알아보았지만 지하철 근처일수록 비쌌다. 서울 시내는 정말 어림도 없었기에 서울 외 경기도 지역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부동산에 대해 잘 아시는 지인으로부터 한 지역을 추천받았다.

정말 상상도 해보지 않았던 곳이라 아내에게 이야기하니 아내도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거기엔 뭐 하러?라고 입을 모아 이야기할 정도였다. 그러나 금액이 딱 좋았기에 나는 아내와 함께 가보기로 했다.


주말 아침 일찍 우리는 그 동네에 도착했다.

평지였으며 신도시라 깨끗했고 아이들도 많아 인프라가 정말 잘 되어 있었다. 아내는 매우 흡족해했고 우리는 그다음 주에 매매하고자 하는 아파트 단지를 두 군데로 정해 다시 가보기로 했다. 부동산에 일가견이 있으신 장인, 장모님은 비행기를 타고 당장 올라오셨고 함께 집을 보러 다녔다.


장인, 장모님도 동네를 마음에 들어 하셨고 우리가 정한 아파트를 둘러보았다.

당시에 부동산 값이 계속 오르고 있던 시기였고 부동산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전화가 와서 '천만 원 더 올릴게요'라고 할 정도였다. 우리가 비교적 괜찮다고 생각하는 아파트 단지에 여러 동을 둘러보았고 마음이 확 끌리는 집은 없었다. 너무 많이 돌아다녀 장모님은 부동산에 좀 앉아있겠다고 하실 정도였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한 군데 더 보겠다고 간 집이 버스정류장과 가깝고 아내가 원하는 저층이었고 나름 괜찮았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상의를 했고 우리는 마지막에 보았던 집을 계약하기로 했다.


10평짜리 방음도 되지 않던 곳에 살던 우리에게 첫 번째 집이 생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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