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산과 동시에 느끼게 된 가장의 무게감
앞선 이야기
아이가 태어난 후 아내와 함께 병원과 산후조리원에 있었다.
병원과 산후조리원은 한 건물에 있었고 신생아실에 24시간 언제든 가서 아이를 볼 수 있었기에 우리는 보고 싶을 때 아이를 볼 수 있었다.
눈도 뜨지 못하는 아이는 꽁꽁 싸매여 있어 손도 발도 움직이지 못 했는데 그 모습이 참 답답해 보였다. 고개만 움직일 수 있는 아이는 하품을 하기도 하고 초점이 맞지 않는 눈으로 이리저리 굴리기도 했고 세차게 울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임신으로 불러 있던 아내의 배는 출산 후 바로 쏙 들어가지 않았다.
부끄러워 나에게 직접 보여주지 않았지만 배는 여전히 조금 불러 있었다. 자연분만으로 2박 3일 병원에 입원 후 산후조리원실로 이동하였고 병동보다는 조금 더 넓고 좋은 시설로 가게 되었는데 아내는 아이를 데리고 오고 싶어 했다. 산후조리원은 쉬어라고 있는 곳인데 아이를 데리고 오겠다고 하자 나는 반대했지만 아내는 그래도 같이 있고 싶어 했고 결국 모자동실을 진행 하였다.
모유수유를 시작하게 되자 아내의 부드러웠던 가슴이 돌처럼 딱딱해졌다.
매일 아내의 딱딱해진 가슴을 마사지해 주었는데 아내는 정말 고통스러워했다. 임신한 이후 출산하여 지금까지 아내의 모습을 보며 엄마가 되는 것은 정말 수많은 고통이 따르는구나 싶었다. 또, 매력적이었던 아내의 몸이 엄마의 몸으로 바뀌는 순간이었기에 임신과 출산이란 정말 위대한 일이구나를 느꼈다.
모자동실을 하게 되어 아이의 꽁꽁 묶여있던 몸을 조금이나마 풀어주었다.
나는 아기가 태어나면 눈도 바로 뜨고 목도 가눌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30대 후반인 나도 아무것도 모르는데 20대 후반의 아내가 알리는 만무 했다. 아이가 대변을 보았고 아내는 처음인지라 무척이나 당황스러워하길래 얼른 내가 기저귀를 갈아주었다. 나도 처음이었지만 10살이나 많으니 내가 조금은 어른스럽게 대처해야 했다.
언젠가 일찍 결혼하여 아이가 있는 친구가 했던 말이 있다.
태어난 아이를 처음 안는 순간, 가장의 무게감이 느껴지더라.
그땐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이제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아이는 부모인 우리가 모든 걸 다 해줘야 했다. 나는 가장의 무게감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내가 마사지를 받으러 가거나 자리를 비우면 홀로 방에 남겨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10년간 일을 했다.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겪고 이겨내며 참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10년간 항상 드는 의문이 있었다.
내가 이 일을 정말 좋아하나? 내가 이 일을 잘하나?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지금까지의 10년은 오로지 나를 위해 살았다. 나의 꿈을 위해 살았고 나의 즐거움을 위해 살았다. 그랬기에 악으로 깡으로 버티며 살았다. 그런데 결혼과 동시에 아이가 생기고 나에게 딸린 식구가 순식간에 둘이 되었다. 지금까지는 나를 위해 살았지만 이제는 나의 가족을 위해 살아야 한다. 행복하지 않았던 나의 가정환경, 그랬기에 내 가족만큼은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지난 10년처럼 나에게 잘 맞지 않는 일을 하면 내가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내 가족이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온갖 생각이 맴돌았다.
지난 10년을 돌이켜보기도 하고 현재의 회사생활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앞으로 우리 가족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시대가 변하고 일의 방식이 변하고 있었다. 스마트폰 시대가 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걸로 돈을 벌기도 하고 자신을 알려 스스로를 브랜드화하기도 한다. 나는 트렌드를 쫓는 일을 해왔기 때문에 항상 이런 세상의 흐름에 올라타야 된다는 생각을 해왔고 변해야 된다고 생각해 왔다.
10년간 회사를 다니면서 단 한 번도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버텼다. 사실 내가 받는 월급으로 우리 가족이 먹고살기에 부족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된다. 더 먼 미래를 봐야 했다. 옆에 있는 팀장님의 모습이 나의 10년 뒤에 모습이라면 나는 행복할까? 그렇지 않았다. 아니, 10년 뒤에 회사에 버티고 있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다. 우리 가족을 위해 미래를 준비해야 했다. 산후조리원에 있는 동안 아내에게 이런 나의 생각을 조금 이야기하기도 했다.
휴가가 끝나고 아내를 산후조리원에 남겨두고 나 홀로 서울로 올라갔다.
집으로 돌아간 날 다음날 출근을 해야 했기에 잠을 청했지만 온갖 생각에 잠이 들지 않았다. 새벽 세시까지 여러 생각이 나를 짓눌러 잠이 들지 않았고 결국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나 회사 그만둘게
새벽 세시였기에 아내가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답장이 왔다.
그렇게 해요
아내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에게 그러라고 했다.
나이만 나보다 열 살 어릴 뿐이었지 마인드는 성숙한 아내였기에 나는 항상 아내의 말을 존중했다. 만약 아내가 그만두는 걸 반대했다면 다시 생각해보려고 했지만 아내는 나의 의견을 받아줬다. 평소 신중한 성격인 데다 따질 건 따지고 넘어가는 아내인지라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를 믿어주는 아내가 고마웠다.
다음 날 나는 사직서를 냈다.
윗분들은 붙잡았지만 나는 확고했다. 그리고 1주일 만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문제는 남은 돈이 얼마 없었다.
집을 매매하느라 모아둔 돈을 다 썼고 내 수중에는 천만 원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 집 재정은 아내가 담당했기에 우리는 그 돈으로 월급이 없는 시기에 먹고살아야 했다. 나는 아내에게 3개월만 시간을 달라고 했다. 딱 그 정도만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내가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해야 했다.
종이를 꺼내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써보았다. 그것을 찾기가 정말 힘들었다. '디지털 노마드'라는 단어가 유행했기에 그들이 어떻게 해서 디지털 노마드가 되었는지에 대해 연구했고 우선 블로그를 시작했다. 그 외에도 인스타그램, 카카오뷰, 티스토리, 브런치 등 할 수 있는 SNS를 모두 시도해보기도 했다. (브런치 작가되는데 6개월 걸렸다. 6번은 떨어진 것 같다)
아내가 산후조리원에서 퇴원한 후 조리를 위해 친정에서 아이와 함께 지냈다.
그동안 나는 홀로 수도권의 집에서 이런저런 것을 연구하고 시도해보고 있었다. 그렇게 약 한 달 반 정도의 시간이 지난 후 아내를 데리러 처갓집으로 갔다 왔고 우리 가족은 드디어 '우리집'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이가 태어난 후 처음으로 우리 가족만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나는 백수가 되었기에 집에서 아내와 함께 육아를 하게 되었다. 결혼하기 전 '육아는 함께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는데 나는 정말 집에서 아내와 함께 육아를 하게 되었다.
출산으로 인해 둘만의 신혼생활이 끝났다.
어쩌면 부부의 인생에서 신혼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의 딱 그 시기인데 우리는 결혼과 동시에 아내가 임신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내는 자신이 상상해 오면 달콤한 신혼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해 많이 아쉬워했다. 그저 미안할 따름이었다.
우리 부부는 열 살 차이가 나지만 육아는 둘 다 처음이다.
이 부분만큼은 누가 더 선배고 후배고 할 것 없이 동일 선상에서 시작하는 육아다. 안 싸우던 부부도 육아문제로 싸운다던데 우리 부부는 과연 어떨까? 자라난 환경이 다른 두 사람, 부모님께 받은 서로 다른 가정교육. 이제 우리는 한 가족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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