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구경할래?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선물

by 세잎

2015년 봄.


매섭게 바람이 몰아치던 지난해 추운 겨울이 지나고 앙상했던 가지들에 푸른 잎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바로 고시생들한테는 첫 번째 고비가 찾아오는 계절, 이다.


모두가 따스한 봄바람에 몸을 맡기고 꽃구경 갈 생각에 들떠 있는 봄, 고시생인 나만 제외하고 세상의 모든 연인과 가족들에게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계절처럼 보였다. 나에게 꽃구경이라고는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에 보이던 들꽃, 아파트 단지에 핀 목련이 전부였다. 벚꽃축제를 향해 가는 사람들 어깨엔 커다란 돗자리가 메여 있었고, 그들을 뒤로 한채 도서관을 향해 가는 내 어깨엔 두꺼운 전공서적들로 가득 찬 책가방뿐이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계절이지만 그만큼 나 자신이 처량해 보이던 그해 봄, 핑크빛 세상 속에 나 홀로 회색빛으로 물들일 것이라 생각했던 나에게 키다리아저씨가 있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월, 화, 수, 목, 금, 토 매일같이 '집 - 노량진 - 도서관'을 반복하다가 유일하게 사람들을 만나며 숨통이 트일 수 있었던 일요일. 어김없이 예배를 드리고 청년부 모임을 향하던 나는 같이 있던 무리들과 이런저런 수다를 나누었고, 나의 키다리아저씨였던 그 청년부 회장 오빠는 나와는 조금 거리가 떨어진 곳 정수기 앞에서 조용히 물을 마시고 있었다.


예고 없이 찾아온 봄 날씨에 모두들 들떠있었고 저마다 계획하고 있는 꽃구경을 이야기해 댔다. 그리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같이 있던 청년들 틈에서 한탄 섞인 목소리로 "아.. 나도 꽃구경 가고 싶다."라며 마음속의 소리를 내뱉었다.


마음의 소리는 마음의 소리일 뿐. 고시생에게 꽃구경이 웬 말인가. 그 후, 나는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고, 공부에 몰두하였다.




한 2주가 지났을까.

일요일이 아닌, 평일 어느 날 키다리아저씨 오빠에게서 문자가 왔다. 보통은 그저 형식적이고도 평범한 안부문자를 보내던 오빠였는데, 그날은 평상시 안부문자가 아닌 조금 다른 내용의 문자를 보내왔다.


"지금, 와이파이 돼??"

갑자기 생뚱맞게 와이파이라니......

"아.. 네! 집이어서 와이파이 돼요. 근데 갑자기 왜요??"


"꽃구경... 할래?"


갑자기 꽃구경 할 거냐는 질문과 함께 영상 하나가 나에게 전달됐다.

뭐지 싶은 마음에 영상을 재생했는데, 영상을 재생하고 10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내 얼굴에는 미소가 띠어졌고 영상이 끝날 무렵에는 눈물이 맺힐 정도로 울컥하기까지 했다.



지금의 남편이 나의 키다리아저씨였던 2015년 봄. 그가 보내온 "꽃구경 할래?" 영상


그동안 도서관에만 틀어박혀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나에게 꽃사진을 보내오는 사람들은 종종 있었다. 와이파이에 꽃구경 얘기까지 하니 이 오빠도 당연히 꽃 사진 하나 보내는 거겠지, 하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는데 갑자기 생각지 못한 영상전해진 것이다.


재생을 한 영상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단순한 꽃 영상이 아니었다. 허리를 숙여 자세히 들여다봐야지만 보이는 작고 예쁜 들풀과 들꽃들부터 이제 막 꽃봉오리가 피어나기 시작하는 이름 모를 꽃들의 봉오리들, 담장너머 보이는 샛노란 개나리들, 흐드러지게 핀 새하얀 벚꽃들까지......


본인이 직접 발로 걸으며 출퇴근길에 틈틈이 찍었던 꽃들이었다. 하늘하늘 흩날리는 꽃잎들을 보고 있으니 같이 그 길을 걸으며 그곳의 바람까지 느껴지는 것만 같은 그런 생생한 꽃 영상이었다. 중국어 임용준비하는 나를 위해 제목도 중국어로 써놓는 센스까지.


주일에 교회 사람들 틈 속에서 꽃구경 가고 싶다고 말했던 내 말이 생각났다며 그다음 날부터 2주간 틈틈이 꽃들을 찍어왔다고 한다. 심지어 바로 앞에서 직접 얘기한 것도 아니고 그저 멀찌감치 떨어진 곳 군중 속에서 혼잣말로 내뱉은 말을 그는 듣고 기억했던 것이다. 진짜로 꽃구경을 가는 건 공부하는데 방해가 될 수 있으니 언제 어디서든 영상을 틀어보면서 최대한 꽃구경하는 기분을 들게 해주고 싶었단다.


바쁜 출근길 시간을 쪼개서 그 영상을 촬영하고, 놓치기 쉬운 발 앞의 작은 들풀들까지 걸음을 멈추고 허리 숙여 찍었을 그 사람의 정성을 생각하니 진한 감동과 함께 괜히 마음이 울컥해 왔다.


그 어떠한 값비싼 선물보다도 더 값진, 나 한 사람만을 위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선물이었다. 그 순간 나한테는 고마운 마음과 함께 뭔가 모를 가슴속 깊은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아주 특별한 꽃구경을 다녀온 그날 이후, 그가 모두의 키다리아저씨가 아닌, 나만의 키다리아저씨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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