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보러 갈래?" 영상을 만들어준 나만의 키다리아저씨 덕분에 고시생인 나에게도 봄날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 봄날도 잠깐.
원래 같았으면 '이 남자 뭐지?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이런 걸? 날 좋아하나?' 하고 이성의 행동에 엄청난 의미부여를 해갔을 나지만, 나의 신분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조차 사치인 고시생 아니었던가. 충분히 의심 가는 행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눈 감고 귀 막고 입 닫은 채로 그의 모든 행동에 의미 부여하지 않기로 했다. 그저 모두에게 잘해주는 친절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기로 다짐했다.
봄바람 따라 살짝 살랑일뻔한 마음을 부여잡고 나는 공부에 집중했고 그렇게 그해 봄이 지나고 여름과 가을이 지나갔다.
계절이 지나는 동안에 그는 그 이후로도 어떠한 고백도 없었으며 그저 꾸준히'특별한 단체문자'를 보내올 뿐이었다. 그 어떠한 부담이나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정도로만 딱 그 정도로만 날 응원하였으며 공부하는 동안 지치지 않게 힘을 주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다시 또 겨울이 찾아왔다. 임고생들이 결실을 맺는 12월.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했던 임용고시를 보았다.
최저 과락 점수를 넘기는 것도 어려운 극악의 난이도로 알려진 중국어 임용고시를 도전했고 중간중간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숱한 유혹의 순간들을 이겨내며 1년을 달려왔다. 소중한 만남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준비했던 시험이었다.
하지만 불합격. 임용고시의 문턱은 생각보다 너무 높았고, 드디어 일반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던 찰나, 나의 신분은 고시생으로 다시 리셋되었다.
불합격 통보를 받은 우울한 12월을 보내던 와중, 키다리아저씨 오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미 그도 나의 불합격 소식을 들은 후였다. 그동안 시험준비하느라 고생 많았다고 밥을 사주겠단다.
나는 새해 1월부터 다시 모든 것을 처음부터 준비해야 했기에 남은 12월은 공부는 잠시 내려놓고 그동안의 스트레스도 풀 겸 재정비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었다. 비워내야 다시 채워 넣을 수 있지 않겠는가. 나의 재정비에 대한 마음가짐을 알았는지 때마침 그에게서 저녁밥을 사주겠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시험 준비하느라 고생했을 교회 동생에게 그저 수고했다는 의미로 밥 한 끼 사주는 정도일 텐데. 만나도 괜찮겠지 뭐.'
아무런 의심도, 의미부여도 하지 않은 채 가장 가까운 날의 가능한 요일로 약속을 잡았다.
"이번주 목요일 어때?"
"목요일이요? 네, 가능해요!"
그런데 약속을 잡고 나서 다시 달력을 제대로 보니 그날이 크리스마스이브가아닌가. 크리스마스이브에 남녀 단둘이 저녁식사라. 선뜻 약속을 잡기는 조심스러운 날이긴 했다. 날짜 구분을 못한 지 오래인 고시생인지라 요일만 생각하고 무슨 날인지 제대로 확인 안 한 내 잘못이었다.
그렇지만 크리스마스이브를 함께 보낼 연인도 없었던 나였다. 연인뿐이랴. 그동안 공부에만 올인하느라 급하게 약속을 잡고 만날 사람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 역시 나에겐 아무 관계도 규정짓지 않은 그저 평범한 교회 오빠였기에 크리스마스 이브라고 해서 뭐 달라질 거 있겠나 싶었다.
'청년부 회장 오빠가 섬김의 목적으로 밥 한번 사주겠다는데 스트레스나 풀 겸 맛있는 거나 많이 먹고 와야지.'
2015.12.24
크리스마스이브 약속 당일
저녁 약속이 있기 전 약속 장소에 일찍 도착한 나는 근처 카페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카페에는 나를 제외하고는 거의 다 커플인 듯 보였다. 고시 공부를 하면서 쓸쓸함, 외로움에 워낙 익숙해졌던 터라 혼자인 내 모습이 전혀 부끄럽지도 다른 이들이 부럽지도 않았다.
그저 '뭐 먹지. 뭐 사달라고 하지.' 아무 생각 없이 저녁 메뉴를 고심하고 있을 뿐이었다. 열심히 핸드폰으로 맛집을 찾고 있던 찰나 메뉴를 찾는 내 핸드폰 위로 뭔가가 불쑥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