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어느 섬에서 봉사를 하던 때 얘기다. 나는 그날의 일정을 모두 소화하고 숙소 마당에서 한숨 돌리는 중이었다. 철새들을 보호하기 위해 밤에는 불을 켜지 않는 곳이라서 더 운치 있었을까, 갑자기 소리 없는 은빛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 둥둥 떠다니기 시작하더니, 주변을 채웠다. 은은한 빛들에 둘러싸여 있는 순간은 몽환적이고 아름다웠다. 이때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반딧불을 보던 순간이고, 내 나이는 스무 살 중반이었다.
그다음 내 인생 두 번째 반딧불은 서른 살에 말레이시아에서 경험한 '반딧불 투어'였다. 혼자 여행하는 중이었는데, 그저 반딧불을 볼 수 있다길래 찾아간 곳에는 온통 가족이나 연인 뿐이었다. 아니다 싶으면 돌아 나오면 될 것을, 굳이 어느 가족과 같이 작은 배를 타고 있자니 외로움이 느껴졌다. 당시 나는 허전했기 때문에, 즐겁고 기쁘게 여행해서 좋은 것으로 나를 채우고 싶었다. 하지만 허전함에 외로움까지 더해지며 배 한 귀퉁이에서 바라보는 반딧불이는 그저 벌레일 뿐이었다.
세 번째 반딧불은 얼마 전에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은 '나는 반딧불' 노래가 되겠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가사말이 내 얘기 같아서 감탄했다. 어디 나에게만 그럴까!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그들에게 위로를 주는 노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하늘에서 떨어진 별, 소원을 들어주는 별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작은 벌레 반딧불이라는 자기 인식에 대한 노래를 들으며, 씁쓸하지만 안정감이 느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기 자신이 여전히 '별'이라고 생각하는 상황이란, 얼마나 아슬하고 외로울지.. 반대로 비록 벌레지만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사람의 현실감은 얼마나 든든한 것인지.. 노래를 듣다 보니, 내가 요즘 가지고 있던 이런 생각들이 떠올랐다.
20대에 나는 특별한 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30대에 나는 별처럼 큰 능력을 가지려고 노력했지만 어려웠다. 한마디로 나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 꿈을 어떻게 이룰지 고민했다. 그리고 40대 중반인 지금의 나는 드디어 '별은 스스로 빛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것'에 초점을 둘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의 시작은 '내가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느냐 보다는, 내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존재가 아니라 따뜻하게 빛을 내며 존재하는 것'에 있다는 생각 말이다.
남편과 나는 마흔과 쉰 사이에 놓여있다. 우리도 이때를 사는 건 처음인지라 종종 당혹스러워서, 요즘 둘이 같이 삶의 무게나 어려움, 두려움에 대해서 얘기 나누는 시간이 늘었다. 남편이나 나는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히어로'도 '원더우먼'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에게 '언제나 믿음직한 그대'는 아니다.
그보다는 때론 둘이 같이 초라하고, 둘이 같이 난감하기 일쑤여서, "여보 오늘 좀 힘들겠네...?"라는 위로라든가.. "내가 뭔가 더 해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라는 미안함이 오가는 때가 많다. 어떤 상황에 대해서는 해답 없이, ‘우리 어쩌지..?’하며 잠들 때도 있고.. 이렇게 같이 하루하루를 징검다리 건너듯이 건너고 있는데, 앞으로 점점 더 난감하고 어려운 상황들이 늘어난다고 하니.. 둘이 같이 사는 데 있어서, 그 이상의 것이 뭐가 있을까 싶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위로하고 상대를 위로하는 상황은 마치, 내 첫 번째 반딧불이었던 어둠 속 은은하게 빛나는 빛무리를 닮았다. 그러다 어느 날 유독 나 자신이나 가족과 소통이 되지 않아서 기분이 외롭고 초라할 때면, 내 두 번째 반딧불 투어가 떠오른다. 내 안의 허전함과 외로움 때문에, 빛이 존재하더라도 빛이 아니라 벌레만 보이던 순간 말이다.
그러니 결국, 내가 안정감을 느끼고 주변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상태란, 내 능력이 특출난 상태라기보다, 나 자신 그리고 주변과 소통이 잘 되는 상태일 거다. 좋을 때보다는 힘들 때일수록. 왜냐하면 반딧불과 빛무리는 어두울 때 보이니까.
* 오늘의 감정 [친근함]
(능력이 부족하고, 나이 들어가는 나 자신이나 배우자와) 친하여 익숙하고 허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