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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날 Nov 15. 2024

'물' 같은 마음

며칠 전에 첫째가 발이 아프다길래 정형외과에 갔다. 아이 발의 통증 부위나 정도를 살펴보던 의사는 가장 최악의 경우 발에서 가장 중요한 뼈가 다쳤을 수 있으니 주의 깊게 살펴봐야겠다고 의견을 주었다. 어쨌든, 발목 인대의 탄력이 부족했다면, 발뼈가 다리뼈에서 빠져나오는 상황도 있을 수 있었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아이가 평소에 뛰어노는 걸 좋아해서 단련되었을 인대가 이렇게 쓰임이 있구나 싶어서 당시는 웃고 말았는데, 그 뒤로 자꾸 곱씹게 된다. '인대가 탄력이 부족하면, 더 큰 부상을 입을 수 있다'는 문장말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안부를 나누던 대화가 다시금 떠올랐다.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인사했었다. "잘 지냈어? 별일 없었니?"

친구는 내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어 별일 없이 잘 지냈어~~"  


한참 전에 있었던 대화지만, 친구의 이 대답이 새롭고 심지어 충격적이어서 종종 떠오르곤 했다. 요즘처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시기에 별일 없다는 얘기가 나에게 따뜻하고 평화롭게 들렸고, 다른 나라 상황처럼도 여겨졌다. 아이가 한 명이고, 부부관계가 좋고, 부모님 모두 평안하셔서 그럴 수 있는가... 좋겠다.. 하는 마음도 들었다.


이 대화를 나누던 당시는, 나에게 사건 사고가 마치 '돌멩이'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잔잔하고 싶은 호수에 자꾸 던져지는 돌멩이들. 하나를 해결하고 나면, 부모가 편찮으셨다. 부모가 괜찮아지시면, 아이들에게 이슈가 생겼다. 아이들이 괜찮아지면, 남편 쪽에서 이슈가 생기고. 이런 식의 쳇바퀴를 돌며 나는 나에게 던져지는 외부 자극이 너무 많다고 여겼다.


상황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서도 거침없이 돌아다니는 첫째를 보며 '돌멩이'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진다. 중요한 지점은 '돌멩이의 유무'가 아니라, 그것이 떨어지는 '호수'에 있다는 방향으로 말이다. 아이의 경우로 따지면, '사고의 유무'가 아니라, 그것을 받아낼 '인대'가 그것에 해당될 것이다.


'별일 없이' 지냈다는 내 친구에게는 정말 별일이 없었을까? 그런 인생이 어딨겠나.. 인생 다 똑같지.

내 생각에 친구는 아마도 '별일'을 '고통스러운 일'로 해석했지 싶다. 대부분의 일들이 친구에게도 있었지만, 그것들로 친구가 고통스럽지 않았다면, 그녀는 별일 없이 잘 지낸 거다. 내게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사건들을 받아내는 마음이 방방이장에서 볼법한 '트램폴린'과 같다면, 바람에도 출렁이는 '호수'일 때와는 상황이 달라지니까.


나는 '물'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쉽사리 마음이 출렁거린다. 그럼에도 내 마음이 '트램폴린'인 척하며 살아보기도 했다. 그랬더니, 물이 트램폴린으로 되진 않고, 흙탕물도 변하더라. 쓰나미가 되기도 하고. 그래서 물이라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고, 그다음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나를 데리고 기꺼이 살아가는 것이었다.


첫째가 다리를 다치면 속상하고, 둘째가 힘들어하니 속상하고, 남편이 괴로워하니 속상하고..

속상한데, 아닌척하느라 애쓰느니, 그냥 맘껏 속상하고 나면 신기하게 좀 나아진다. 이게 내 마음의 '인대'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래야 더 큰 부상'이 없기 때문이다. 속상한데 아닌 척하느라 애쓰면, 화나고 미워하고.. 복잡해지니까. '물'같은 마음을 가진 자로서, 나의 '물'같은 마음을 존중해 주는 게 다름 아닌 '내 마음의 인대'인데.. 그래서 나는 별일이 많다. 멋져 보이지 않게 시리.



* 오늘의 감정 [차분함]

(약함을 인정한 뒤에 찾아오는) 가라앉고 조용한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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