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지 않고 세상을 관찰만 하는 아이가 있다. 아마 아이는 '태어나면 뭐가 좋을지?'를 따져보며 세상에 대한 간을 보고 있거나, '태어나는 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불안한 상태일지 모르겠다.
그러다 이 태어나지 않은 아이가 태어나는 쪽으로 마음을 먹게 되는데, 그 이유는 다름 아닌 평범한 또래 아이의 삶에 있었다. 다친 아이가 엄마를 찾아가서 위로받고, 다친 곳에 엄마가 반창고를 붙여주는 모습을 보며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태어나기로 결심한다. 그림책 <태어난 아이>의 이야기다.
아이 자신이 태어나는 것을 '주체적'으로 선택하는 이야기는 <내가 엄마를 골랐어!>라는 그림책에서도 본 적이 있다. 우리 집 첫째 아이가 유치원에 다닐 때 이 책을 무척 좋아했다. 지금은 아이가 자신이 태어난 가정에 대해 실망도 하고 불만도 많은 십 대이지만, 아이에게 아직 부모가 세상의 전부인 순수하던 시절에 '자신이 엄마를 선택했다'는 메시지를 아이는 좋아했다.
지금은 어떨까?! 나를 속속들이 아는 우리 첫째는, 그래도 나를 엄마로 선택할까?
세상이 그렇게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 지금도, 아이는 태어나기를 선택할까?
<태어난 아이>가 태어나기로 결심한 이유로 돌아가보면, 세상이 녹록해서는 아니다. 아이가 원했던 것은 '공감'이었다. 태어나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보살핌'인데, 그것은 다시 말하면 아이의 처지에 대한 진심어린 공감이지 않을까. 달리다가 넘어져서 까진 상처 때문에 작아진 마음을 알아주는 '마음의 보살핌'과 아픈 몸을 치료해 주는 '몸의 보살핌'은 사실 엄마가 아이의 상황에 온전히 닿아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이가 자기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가일 때는 아이의 마음과 몸을 보살피는 게 더 쉬웠다. 작은 일로 슬퍼하거나 속상해도, 작은 상처에 소스라치게 아파해도 '호호' 해주며 아이를 흠뻑 위로해 줄 이유가 있었다. 어리니까.
그 아이가 '생각'이라는 것을 좀 한다고 여겨질 때부터, 아이의 슬픔이나 분노를 내가 판단하기 시작했다. 아이 감정에 '그럴만한 일이 아니다'라는 판단이 개입되기 시작하니, 아이의 슬픔과 분노를 아이 처지에 맞게 보살피는 게 어려웠다. '세상은 원래 그리 녹록하지 않다'라는 이유도 추가시키며, 내가 충분히 공감해주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냈다.
<내가 엄마를 골랐어!>에 따르면, 이런 엄마라는 것을 다 알면서도 아이가 나를 엄마로 골랐다는 건데... 도대체 우리 집 첫째는 나를 엄마로 선택하는 데 있어서 어떤 생존 전략이 있었던 걸까?
어제 초등학생인 첫째는 세상이 마음 같지 않아서, 엄마도 마음 같지 않아서 불만이 많았다. 눈이 펑펑 오는 신나는 날에 친구들이랑 실컷 썰매도 타고 눈싸움도 하고 싶은데.. 친구들이 모두 학원 셔틀버스를 타는 바람에 아이는 실망했다.
그래서 혼자라도 실컷 썰매를 타려는데 철없는 동생이 누나 썰매가 탐나 가져가서 주질 않았다. 그걸 어떻게든 가져오려고 했는데, 아직 서툰 방법이라 동생을 울리고 말았다. 엄마가 자기 마음을 위로해주기는 커녕 동생을 울렸다고 타박까지 하니, 동생이 더 얄밉고 속이 답답해서 놀이터 출렁다리에 분풀이를 해보았다. 촹촹 췡췡 발을 힘껏 굴리려다 보니, 분풀이를 '너무' 시끄럽게 한다고 엄마에게 한소리를 더 들었다.
이렇게 불만에 불만이 더해졌던 아이가 자기 전에 나에게 청한 것은 씻고 나와서 젖어있는 머리를 말려달라는 것이었다. 결국 아이에게 필요했던 것도 보살핌이었는데, 자신이 필요한 것을 정확히 느끼고 청하는 아이의 모습에 나는 든든함이 느껴졌다. 이 녀석, 앞으로도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잘 찾아서 채우겠구나 싶어서인데, 자식을 독립시켜 내보내는 엄마에게 이보다 더 든든한 게 있을까.
태어나기로 결심한다는 것은 결국 적극적으로 자신을 보살피겠다는 의지가 아닐까.
첫째가 나에게 보살핌을 청하듯이.
그러고 보니, 아이의 생존 전략을 알겠다. 아이는 어느 순간에도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지 않는 기질을 타고났다. 어떤 시련에서도 '자기 자신의 욕구'를 자신이 나아갈 방향키로 잡는 아이를 키우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지나고 보니 그만한 '생명력'도 없다.
아이는 일을 해나가는 때이든, 힘든 자신을 추스르는 때이든 그 중심에 '자기 자신'을 두고 자신의 처지에 진심으로 공감한다. 심지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보살핌'이라면, 그것을 엄마에게 요구해 가며 자신의 것을 채운다. 그러므로 첫째는 아마 나를 엄마로 선택하는 데 있어서, '부족하면 내가 요구하지 뭐'라는 생각을 했는가 보다.
아이의 젖은 머리를 드라이기의 뜨끈한 바람으로 말려줄 때면 아이는 고양이 한 마리로 변한다. 고롱고롱 소리를 내기도 하고, 좋은 느낌을 고스란히 표현하는데 아가 때 모습 같기도 하다. 그때 '오늘 이러저러해서 기분이 그랬겠네..'라고 내가 한마디 더해주면, 아주 그냥 대만족이라는 소리와 함께 노곤해져서 그 뒤로는 잠도 솔솔 잘 잔다.
나도 태어나야지!
두 사람이 만나서 만들어지는 촉감은 두 사람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는데, 내가 아이의 머리칼을 쓰다듬을 때 나에게 느껴지는 촉감도 좋다. 아이가 좋아서 내는 소리에 내 기분도 좋아진다. 아이의 머리를 말려주며, 사실 나도 채워진다. 상대가 편하면 나도 편해지는 법이고, 그런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나를 으쓱하게 하니까.. 아이에게 '보살핌'을 주지만, 나에게도 몸과 마음에서 '보살핌'이 채워지는 순간이다.
시작은 첫째가 머리를 말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에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얼마든지 매 순간 태어나야겠다. 내가 나에게 자신을 보살피라고 요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생각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삶에 대한 생기가 느껴지니 신기하다. 그 시작은 나에게 이렇게 물어보는 것으로 해봐야겠다. “지금 바라는 게 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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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만이 가득했던 하루를 보낸 딸과 나에게)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주거나 슬픔을 달래 줌
* 이야기에 등장한 그림책
<태어난 아이>, 사노 요코, 거북이북스, 2016
<내가 엄마를 골랐어>, 노부미, 위즈덤하우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