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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날 Dec 13. 2024

어쩌다 보니 호호.   

초행길이라 의지할 것은 내비게이션뿐이었는데, 무심한 기계는 무심하게 도착 예정 시간을 자꾸만 늦췄다. 약속 장소로 향하는 우리에게는 ‘약속 시간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뿐이었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는 길에 다른 변수가 없기를 바라는 게 전부였다.


영화를 보면, 이런 순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곤 하지만 우리는 영화 속에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니 그냥 내비게이션에 찍힌 시간에 도착할 거라고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우리의 현실에는 특징이 하나 있으니, 바로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영화에서야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이 벌어지면 재밌거나 스릴 있기 마련이지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재미있지도 않고, 그때 느껴지는 스릴은 반갑지도 않다는 특징도 추가해야겠다. 예정보다 길어진 차속 시간으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시간이 빠듯한 상황에 화장실도 가야 했을 때, 쌩쌩 달려도 모자랄 판에 자동차가 덜컥 구덩이에 빠져버렸을 때 내 마음이 딱 그랬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사실 1,2년 운전한 경력이 아니기 때문에, 초행길에 차가 막힐 수도 있어서 여유 시간을 넉넉하게 잡고 일찍 출발했었다. 그런데도 방어되지 않은 여러 가지 상황들에 우리는 당황했다. 심지어 차가 구덩이에 빠졌을 때는 크게 놀랐고, 차 바닥이 긁히는 것이 속상했다.


따지고 보면, 이런 일은 살다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으니, 유난스러울 것도 없다. 난감하고, 당황스럽고, 놀랍고, 속상한 마음이 드는 것말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들에 이날 유독 더 난감하고, 당황하고, 놀라고, 속상했던 것은 사실이다.


미리 대비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이 평탄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변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또 배웠고, 이번을 계기로 나의 경험치는 한 단계 레벨 업이 되었다."고 상황을 종료시키려니 뭔가 아쉽다.






친구와 나는 같은 것을 경험했지만, 반응 정도가 크게 달랐다. 같은 차를 타고 있었으니 우리가 경험한 구덩이의 실제 깊이는 같을 텐데, 친구가 빠진 구덩이는 내 것보다 얕아 보였다.


보조석에 앉아있던 내가 밖으로 나가서 자동차가 내려앉은 이유를 확인했고, 한쪽 바퀴가 꽤 깊은 구덩이에 빠진 것을 발견했다.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던 나는 적지 않게 놀란 반면, 운전대를 잡고 있던 친구는 "내가 할 수 있어"라며 자신감을 보였다. 친구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힘이 있어서, 내 마음을 안심시켰다.


친구가 한치 주저함도 없이 단번에 자동차를 끌어올리는 동안, 나는 자동차가 긁히면 어쩌나 걱정이 컸다. 실제로 자동차 바닥이 긁히는 소리는 마치 내가 긁히는 것마냥 자극적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그런 건 괜찮아"라고 했다. 이 말도 나를 안심시켰고, 나는 친구 덕분에 다시 평온을 찾게 되었다.


  




운전에 있어서는 그 친구의 감정 구덩이가 나의 것보다 얕은 게 분명하다. 그렇다고 시무룩해질 이유가 없는 것은 다른 주제에 있어서는 내 구덩이가 그 친구의 것보다 얕기 때문이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는 말도 있듯이, 감정 구덩이가 없는 인생은 없다. 인생을 80년 이상 사신 분들은 모든 주제에 있어서 감정 구덩이가 좀 얕을까? 혹은 없을까? 그때도 깊이 속상한 것은 깊게 속상하고, 크게 분노할 것은 크게 분노하게 되지 않을까.. 다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구덩이가 깊은 '주제'를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것이지 아닐까..


나는 원래 운전 자격을 아주 어렵게 얻었다. 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운전할 때는 심장이 콩알만 해져서 운전면허 시험응시 딱지가 종이의 절반을 넘게 덮었더랬다. 사람이 쉽게 변하지 않는다더니, 자동차라는 물건은 여전히 나에게 어렵다. 그래서 그 물건을 손쉽게 잘 다루는 친구가 나는 좋다. 멋져보인다. 아, 그러고 보면, 나에게도 수월한 주제가 있는데, 그 주제에서는 나도 쫌 멋져 보이려나? 그렇겠군. 호호.




* 오늘의 감정 [자연스러움]

(나를) 억지로 꾸미지 아니하여 이상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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