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우리는문학을 통해 만났다. 문창과 교수와 제자 사이로 연을 맺은 것이다. 등단자가 많은 대학답게 실력이 뛰어난 친구들이 많았고, 적잖이 기가 죽었던 것도 사실이다. 수려한 문장의 학우들은 늘 칭찬의 대상이었다. 작품을 합평할 때면 특기생들 위주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우수한 실력의 학생들이 대접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교수님들도 눈에 띄는 학생들을 더욱 눈여겨보며 대회 공문이 내려오면 조용히 그들을 소환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마음을 주는 일에 늘 공평했다. 거나하게 술이 취하면 교수답지 않은 말로 우리를 당혹스럽게도 했지만, 우리를 사랑한다는 믿음이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나이 들어 갔다. 우리는 종종 세미나를 하며 인연을 이어 갔고, 학원 수업을 하게 된 내게 교수는 스스럼 없이 곁을 내어주며 명강의를 자원하곤 했다. 대학 시절처럼 나는 늘 그에게 작품을 보였고, 그는 변함없는 나의 끈기만을 칭찬하고는 했다. 그렇게 세월을 덧입혀가며 스승과 제자 사이를 끈끈하게 이어갔다. 그는 내 소설집에 해설을 써 주었고, 나는 퇴임을 기념하는 시집에 표4를 썼다. 시간의 세례를 받으며 소소한 안부와 일상을 공유하며 고요히 나이 들어갔다.
그는 여전히 술을 많이 마시고, 교수보다는 시인이 어울린다. 차가운 맥주의 목 넘김을 사랑하던 그는 이제 맥주에 미지근한 물을 타서 마신다. 나는 여전히 눈에 띄는 필력을 얻지 못했으며 소설가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 삶을 산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쓰며 산다. 퇴임을 앞둔 그가 무심히 던진 말 한 마디. "연구실에 있는 책 좀 가져가라." 허물없는 동기와 먼지 가득한 교수실에서 유물 같은 책을 정성껏 실어 날랐다.
좁은 연구실에서는 여전히 종로서적이 건재하고, 교보문고의 책 포장지가 새것 같다. 20년 전 새내기가 되어 전공 서적을 닦고, 고되하며 집필했을 원고 뭉치들을 건너다본다. 연구실에 있던 책들은 내가 읽기엔 너무 버겁고, 세로 읽기가 생소한 내게는 한낱 책꽂이에 머물 책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책장에 한 권 한 권 그의 소장 도서들을 정리하며 한 사람의 인생을 경건한 마음으로 맞이한다. 한 평생 연구자의 자세로 치열했던 그의 삶은 깨알 같은 메모로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 허투루 강단에 서지 않았던 녹록지 않은 교수의 생이다. 교단 앞에 서서 한 줄의 작품평을 하기 위해 그는 얼마나 많은 이론서를 읽고 수없이 창작하며 홀로 긴 밤을 지새웠을 것이다.
그제야 나는 왜 그가 이 낡고 오래된 책들을 헌책방이나 도서관에 기증하지 않고 제자에게 넘겼는지 언뜻 이해한다. 누군가는 편지를 써서, 한 자 한 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보낸 선물 받은 책들에 대한 애정이, 지난 세월의 추억이, 노력하며 살았던 삶이, 썩 어울리진 않지만 교수답게 살고자 했던 젊은 나날이 책장 사이사이 오롯이 생을 증명하며 담겨 있었다.
나는 큰 책장을 두 개 장만해 그의 생을 빼곡히 옮겨 담았다. 먼지를 털고 책장을 넘기니 호탕하게 웃고 있는 사진도 두 장 나오고, 성적에 불만을 표한 쪽지도 나온다. 그리고 돈이 담기지 않은 빈 봉투도 나온다. 실력껏 연구자로 부유한 삶을 살기보다는 가난한 시인의 길을 택했던 그답다.
우리는 여전히 쓰며 서로의 책에 이름을 남기고 부끄럽지 않게 늙어갈 것이다. 취업률이 저조하다는 이유로 폐과가 결정된 지금, 따뜻한 동기의 우애와 늙은 교수를 향한 애정과, 한 때 내 청춘이 뜨거웠던 그 땅을 기억하련다. 늙은 교수의 방을 정리한 고단한 밤, 마음만은 20년 전 그날처럼 청청하다.
노교수가 내게 남긴 건, 육체가 고단한 오늘 같은 날에도 오롯한 감정을 기록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게 살게 해 준 것이다. 늘 메모장을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작은 것 하나하나 감정이 생생할 때 일일이 적던 그의 버릇은 어느덧 나의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망각은 신이 준 최고의 선물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늘 메모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글을 쓸 때, 그 감정선을 다시 찾기 위해서는 바로바로 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가르치셨다.
그 귀한 가르침 덕에, 나 또한 쓰고 싶은 문장 앞에서는 결코 게으름 피우지 않는다. 반듯한 원고지 앞에 앉아 생생한 감동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는 부지런함. 그것이 노교수가 내게 남긴 최고의 가르침이리라. 오늘 노교수의 방을 정리하며 가슴 가득 품었던 말들도 활자가 되어 내 삶의 소박한 역사로 아름답게 추억될 것을 믿는다. 문학판에서 끈기 있게 살아남는 집필 벽은 스승님이 내게 물려준 가장 멋진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