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세계 2025년 2월호 ㅣ 신작 에세이 ㅣ 강아름
학원에 가던 발걸음을 멈춰 선다. 어둡지도 않고 주변에 사람도 많은데 또다시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압박감은 기도를 타고 올라와 머리를 쥐어짜며 주변을 어둡게 만든다. 모두가 함께인 낮에 혼자가 돼버려 눈치 볼 필요가 없어진 나는 울음을 터뜨린다. 어린애가 뭐가 그렇게 힘든지 오열하며 돌아다닌다. 어느 밤엔, 그냥 창문 밖을 바라본다. 어둠이 무서운 건물들을 숨겨주고, 신경질 나던 빛은 별처럼 빛나게 만들어 주고, 날씨는 시원하게 만들어주었다. 끝이 보이지 않으니 그래도 조금은 이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보다 그 아름다움을 느낄 용기도 나지 않아 그냥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가 공원 그네에 앉아서 운다. 언젠간 다 무시하고 하루 종일 게임만 하다가 밤이 돼서 그냥 무작정 언덕 위로 걸은 적도 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뒷산의 초입에 있는 의자 아닌 의자에 걸터앉는다. 이미 같은 눈물을 많이 흘려서인지, 눈물조차도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 무력감 때문인지, 그날따라 울지도 않았다. 단지 무표정하게 나라는 캔을 더 찌그러뜨렸다. 나를 더 작게 작게 압축해서 봉투에 담겨도 아무도 모를 정도로.
항상 시작은 반짝반짝 빛났다. 내가 태어난 이유를 찾은 것처럼 가슴이 벅찼고, 그것을 위해서 내 인생을 바쳐도 부족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소중했다. 그렇게 멋지게 성장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고 오늘부터 해나가야 할 것들에 대한 계획을 세웠다. 초등학생 때까진, 그 계획들을 빠짐없이 해나갔고 못 한 날이 있더라도 그 주나 그달 안에는 해냈다. 전교 1등과 반장과 합창단과 밴드부를 하던 멋진 초딩이었다.
중학생이 되고 나서 목표에 다다르기 위해 더 성장할 것을 스스로 요구했다.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어머니께서 당시에 보기에는 ‘무리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계획을 처음으로 못 지키기 시작했고, 사춘기와 겹치면서 어머니와의 소통도 줄어들었다. 목표가 있고 그에 적합한 계획을 세웠는데 하지 않는 게으른 내 모습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난 극복해야 했다. 남이 보면 별거 아닌 이유이지만 나에겐 삶을 살아갈 이유를 앗아가는 혼돈 그 자체였다. 그렇게 나만의 ‘원인 찾기’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로 찾은 원인은 ‘목표’이다. 초등학교 때 정한 ‘경찰청장’이라는 목표는 내가 원하는 목표가 아닌 부모님이 정한 목표라고 생각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스스로 명확한 목표를 세우면, 의지가 생겨서 계획을 다시 해나가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목표가 정해지기 전까지는, 하기 싫은 일들을 계획한 대로 꾸역꾸역 해나가다 실패하고, 방법을 고민해서 해결했다가 다시 실패하기를 반복했다. 결국 3학년 말, 부모님이 하기 싫으면 공부하지 말라는 말에 모든 학원을 그만두고 공부에 손을 놓는다. 그래도 목표만 생기면 다시 극복할 수 있다는 ‘강력한 믿음’이 나를 살아가게 했다.
고등학생이 되고, 필립 짐바르도의 TED 강연을 보게 되었다. “The Psychology of Evil”이라는 제목의 강연은 나를 강타한다. 법, 정치, 경제, 문화적 배경 같은 체계가 개인을 타락시킬 만한 나쁜 환경을 만드는 힘을 가졌고 그런 환경 아래에선 정말 보통의 인간도 악마가 될 수 있다는 교수의 말은 나에게 그토록 원하던 목표를 주었다. 바로 ‘인간의 변화’이다. 살면서 “사람은 고쳐 쓰는 것 아니야.”라는 식의 말을 너무 많이 들어보았고, 악인에 대해서는 그 개인의 탓으로 돌려 비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악이 타고나는 개인의 특성이라면 개선의 여지가 없기에 단지 그 악마를 사회와 분리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겠지만, 그 원인이 환경과 체계에도 있었다면 악마도 보통의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내가 해보고 싶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관련된 일을 할 수 있는 직업을 찾아보고 관련된 공부(심리학 같은)를 하기 시작했다. 그 후, 관련 드라마나 독서를 통해서 흥미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방과후 심리학 교수님의 지지로 이를 적성으로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나의 혼돈을 정리해 줄 ‘목표라는 질서’를 드디어 찾은 것이다.
그러나, 효과는 잠시뿐이었고 나는 다시 실패했다. 목표라는 Why는 명확해졌으니 문제는 방법, How라고 생각했다. 이때부터 나만의 ‘원인 찾기’를 미친 듯이 해나갔다. 자기계발서를 읽고, 성공한 사람들의 강연을 듣고, 그런 방식으로 나를 이끌어 줄 수 있는 학원도 다녔다. 수백 번, 수천 번을 실패하고 수정했다. 조금이라도 지치는 날엔, 등대가 길을 밝게 비춰주는데도 따라가지 못하는 바보가 된 것 같았고, 그 불빛에 더 칠흑이 돼버린 바다를 떠다니며 점점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모두 다 효과는 잠시뿐, 단 한 번도 만족할 만한 성취를 이뤄내지 못한 채 그렇게 대학에 갔다.
그래도 목표는 놓을 수 없었다. 가라앉을 것 같을 때마다, 그래도 저 등대가 비춰주는 빛만 따라가면 된다고 설득했고, 어떻게든 힘을 모아 팔을 저었고 발을 찼다. 그때, 한가지 생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지금까진 하고 싶은 공부를 한 게 아니라는 생각, 빛을 보고 따라가려고만 했지, 정작 당장의 나는 빛이 없는 어둠에서만 헤엄을 쳤다는 착각. 그래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돈으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교정직은 사촌 형이 근무 중이라 정보도 있었고, 점수도 낮았고, 내가 하고 싶은 분야에도 그나마 가까웠고, 공무원이라 수입도 안정적인데 개인적으로 공부할 시간적 여유도 있는 직업이었다. 그래서 입학하자마자 모든 대학 생활을 포기하고 공무원 공부를 시작했다. 그 이후로 이어진 대학 생활 1년, 휴학 생활 2년은 내 인생의 최악의 시간이었다. 공무원 공부라는 것은 여전히 내가 하고싶은 공부와는 멀었고 계획은 계획에만 머물렀다. ‘원인 찾기’를 하는 것도 지쳐버려 온몸에 힘을 잃고 해저와 맞닿기 직전에, 삼촌이 나를 구조했다. 소방을 준비하는 사촌 동생과 함께 어찌어찌 공부해서 결국 교정직에 합격했다. ‘드디어 나도 빛을 받는구나, 즐겁게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며 목표를 향해 성장해 나가겠구나, 더 이상 가라앉지 않아도 되는구나’라고 착각했다.
발령을 받고 일에 적응한 후, 처음에는 하고 싶었던 행동 심리 자격증도 따고 관련 학사도 준비하며 즐겁게 공부했다. 마치 등대가 점점 크고 명확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옳다는 ‘확신’이 들었고,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지식과 경험을 종합해서 ‘Camping 시스템’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 시스템은 ‘완성본’이었으며, 시스템 안에서 나는 끊임없이 성장하며 행복해질 거라, 더 이상의 ‘원인 찾기’는 필요 없을 거라 확신했다. 이젠 공부한 것을 활용하여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더 높은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이유로 보호직 7급을 선택했고 다시 공무원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 시작은 이전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고, 어떤 상황적 필요도 없었으며, 내가 원하고 성장할 수 있는 직업이었고, 심지어 목표 설정과 방법에 대한 완성된 시스템도 함께였다. 그러나, 다시 계획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원인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주변에선 잘해 나가고 있는 거라고 위로했다. 빛은 점점 흩어지고 다시 어둠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끝까지 놓지 않는 끈 하나는 시스템이었다. 그것은 나만의 ‘원인 찾기’를 셀 수 없이 반복하며 얻은 보물이었다. ‘나는 이런 적성을 가진 게 분명해, 이런 목표에 대한 욕구가 있는 게 분명해, 그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방법은 더 이상 완벽할 수 없어.’
원인이 무엇일까?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냥 답답한 심정으로 어머니와 대화하다 몸속 가득 차 있던 물을 뱉고 말았다.
나에게 원인을 찾는 능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정하기 힘들었다. 그 능력이 있다고 믿기 위해서 다시 칠흑 같은 바다로 빠질 수 있을 정도였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중학생 때, 어머니께 물어보았다고 한다.
“엄마는 꿈이 뭐였어?”
어머니는 자기의 성격이나 적성을 따졌을 때 혼자 사업체를 장이 되어 관리하는 약사가 맞을 것 같아 약사가 꿈이었는데, 점수를 맞춰서 간호대를 갔고 간호사가 되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내가 그러면 살기 싫지 않냐고, 어떻게 살아갔냐고 물어보았다고 했다. 그때, 어머니는 느꼈다고 했다. 이 아이가 삶을 힘들게 살아가리라는 것을. 자기만의 관점에 갇혀, 그 선 밖을 벗어나는 순간 스스로가 중요하지 않게 되어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리게 될 나를 꿰뚫어 본 것이었다. 내가 내 관점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원인 찾기’였다. 원인을 찾는 능력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긍정적인 착각을 했고, 그 능력으로 목표에 대한 욕구도 찾았고, 나를 성장시키는 방법도 찾았고, 삶에 대한 통찰도 얻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능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한 분야의 최고 전문가도 그 분야에 대한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자신의 모든 지식을 활용한다. 그래도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나는 당연히 그런 능력을 갖췄을 리 없다. 너무나 쉬운 판단이었다.
그렇게 난 처음으로 내가 그려놓은 선 너머를, 커튼 너머를 보았고 깨달았다.
내가 성장한 이유는 단지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학생 때, 목표를 찾기 위해서 발버둥 친 경험들은 고등학생이라는 어린 나이에 정말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발견하도록 만들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고 들은 자기계발서와 강연들과 조언들, 그리고 내 삶에 적용해 보기 위해 한 수백, 수천 번의 시도와 실패는 나에게 맞는 방법을 찾도록 만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심성, 능력, 지식, 관계 등등은 모두 경험이 하나하나 만들어 나간 것이었다. 그런데 만족할 만큼 충분히 공부해 본 적은 없다. 더하면 죽을 것 같을 때까지 공부했는데 죽지 않는 걸 스스로 경험했다면, 그 경험들이 쌓여나갔다면, 이미 공부를 지속하는 데 어려움이 없는 나로 성장했을 것이다.
등대가 비추는 빛(질서)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오직 어둠만이 가득한 바다(혼돈)만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어딘가를 향해 헤엄쳤던 것은 사실은 단지 떠 있기 위한 것이었고 그걸로 충분한 것이었다.
난 당장 떠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눈앞에 놓인 것들에 집중하고 문제를 분석할 시간에 한 번 더 실패를 경험할 것이다. 함부로 인생을 완성하려 하지 않고, 조금씩 채워나간다는 마음으로 살 것이다. 이것이 나만의 ‘원인 찾기’를 포기하고 일어난 일이었다.
모든 범주는 상상의 산물일 뿐이라, 그 질서, 그 세상 안에선 모든 것이었던 것이 벗어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질서 안에서 판단한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 편리를 위한 것이고, 오류 가능성이 높다. 유일한 방법은 질서를 벗어나 혼돈과 마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삶과 성장과 같은 좋은 것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에 삶을 겪다 보면 좋은 것을 만나게 된다. 자연에서 생물의 지위를 매기는 단 하나의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생물이 어떤 관점에선 중요하고 어떤 관점에선 쓸모없다. 그래서 모든 생물이 중요해질 수 있다. 혼돈이야말로 좋은 것을 만나게 해주고, 나를 중요하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질서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