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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절반의 실패

by 별사탕

감독 우민호

각본 김경찬, 우민호

각색 이기철

기획 김원국

주연 현빈, 박정민, 조우진, 전여빈, 박훈, 유재명, 릴리 프랭키, 이동욱

촬영 홍경표

편집 김만근

조명 박정우

미술 김보묵

의상 곽정애

분장 김서희

특수분장 황효균, 곽태용

무술 이건문, 임효우

VFX 김남식

사운드 최태영

동시녹음 조민호

음악 조영욱

개봉일 2024년 9월 9일

촬영 기간 2022년 11월 20일 ~ 2023년 3월 29일[10]

상영 시간 114분 (1시간 53분 55초)

제작비 300억 원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애국심을 고취하는 일은 실제 역사의 교훈을 제시하는 것보다 예술적 감흥을 주는 방식이 더 효과적이다. 예술은 꼭 사실이 아니어도 된다는, 상상적 허용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깜깜한 어둠의 광장에 촛불하나 밝혀든 백성들의 나라 조선’을 강조하는 영화다. 너무도 당연해서 새로울 것이 하나도 없는, 진부하기 그지없는 화두. 그러나 표현된 영상미 하나만큼은 수작이다. 결국 껍데기에 담은 알맹이가 형편없다는 얘기다. 정말 김훈이 이런 식으로 소설을 썼을까 의문스럽다.


1. 안중근이 잘못됐다.

현빈의 연기가 힘 빠지게 만든다. 정우성의 오버액션이 코미디스럽다. 한 명은 대사로, 한 명은 행동으로 관객을 힘들게 한다. 유재명(최재형 역)만큼의 대사력을 기대하진 않지만 너무 기계적으로 대본을 읽어댄다. 주연급을 제외한 이들 조연들이 보여주는 연기들이 하얼빈을 살려놓았다.

와중에 박훈(모리 역)은 수훈감이다. 가장 분명하게 살아서 빛나는 얼굴을 보여준다. 그의 존재감이 악의 축에 비유된다면, 반대급부적으로 그만큼 선의 축이 강조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등장인물들이 사건을 중심으로 역동적으로 얽혀나가면서 자연스럽게 긴장은 고조되고, 개별 인물들이 생생하게 살아나야 하는 유기적 구조를 형성해야 한다. 그러나, 하얼빈은 왠지 사건도 죽고 인물도 죽었다. 파편적이라는 얘기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얽혀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 와중에 이창섭(이동욱 분)이 희생하여 모리에게 총을 맞는 장면에서 흙묻은 그의 얼굴은 왜 그렇게 뽀얗고 말끔한가. 이런 기초가 안 되다 보니, 다이너마이트 실은 마차가 전차와 부딪치면서 폭발하는데, 불을 붙이지 않고 어떻게 폭약이 터질 수 있는지 의문까지 든다.(실제로 불안정한 폭약의 경우 작은 충격에도 폭발할 수 있다.) 영화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들이다.

이 모든 출발이 안중근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면서부터다.


1. 아름다운 영상의 뒤편

스크린 위에는 아름다운 장면들이 매 순간 등장한다. 빙판 위에 누워서 고뇌하는 안중근은 마치 예수가 광야에 나가 악마의 속삭임을 극복하고 돌아오는 장면을 연상시킨다. 말을 타고 만주의 사막을 달려 나가는 장면, 안가에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이 어둠을 만들어 빛과 어둠이라는 두 개의 세상을 보여주는 장면, 느리게 찍은 전투장면에서 보여주려는 지옥 같은 무언의 아우성 등등, 이 영화는 장면 장면에 무수히 많은 공을 들였다는 것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게 한다. 영화란 이런 것이다. 대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장면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걸, 텔링이 아니라 쇼잉이라는 걸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역사의 러시아 군중들, 술집에서 배경으로 등장하는 러시아 술꾼들의 모습, 열차에 앉아 있는 배경으로써의 승객의 모습들은 AI가 만들어낸 인물들이다. 사람이 그렇게 연기할 수는 없다. 사운드 역시 그렇다. 어둠 속에서 이마에 등불을 걸고, 긴 꼬리를 달고 달리는 증기기관차 역시 그렇다. 이제 우린 영화 속에서도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면서, 혹은 구분하지 못하면서 영화를 봐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TV프로그램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장면에서나,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삽화로 끼워 넣어진 장면 등에서 이제 AI를 만나기란 너무 잦고 쉬운 현실이 되었다. 새로운 제작 환경이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해야겠지만, 너무 눈에 띈다면 그것도 문제다. 삶을 현실이 아닌, 게임으로 이해하는 세대에게 이건 독이 될 게 뻔하다는 우려가 들기도 한다.


1. 영화에서 마음은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나

마지막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안중근이 화면을 향해 걸어 나오면서 관객에게 독백의 형식으로 말을 건넨다. 그게 이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메시지, 주제가 되겠는데, 그렇게 교훈적으로 영화를 끝내고자 마음먹었다면, 더 강렬한 그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내가 상상한 장면은, 안중근이 카메라 앞에 놓인 유리벽 위에 손바닥을 올려놓으면, 그건 다시 안중근의 손바닥 도장으로 변하고, 그 옆으로 안중근이 쓴 유묵의 글씨가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것으로 종지부를 찍는 장면이었다. 안중근이 외쳤던 '까레아 우라'가 짙은 먹색의 안중근체로 화면을 장식했다면!

이런 방식은 마음을 직접 보여주는 방식 중 가장 단순하고 흔한 방식이다. 안중근이 말을 하면서 끝내고자 연출이 마음을 먹었으니, 그에 버금가는 마무리를 이야기했을 뿐이다. 저런 식으로 끝내려면 저 정도의 마무리는 해야지, 하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결국 용두사미가 된 꼴.

눈으로 볼 수 없는 마음을 대사로 보여주는 방식, 행동으로 보여주는 방식, 글로 보여주는 방식, 그게 뭐가 됐든, 영화는 영화만의 방식을 이루어냈을 때 박수받을 것이다. 그게 뭔지는 연출의 몫이다.


1. 치명적인 장면

안중근 스토리의 압권, 하이라이트는 단연 격발하며 만세를 외치는 장면이다. 그 장면을 부감으로 찍은 이 영화는, 도대체 안중근이 어디서 총을 쏜 것인지 알 수 없게 만든다. 그 넓은 화면 속에서 눈깔을 몇 번이나 굴려 찾아봐도 이등박문이 화면에서 끌려나가는 동선은 있어도 안중근이 뛰어 들어와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면은 없다. 세 명의 헌병이 한 곳을 향해 소총을 겨누고 들어가는 장면이 다다. 기운이 많이 빠진다.


제작비 300억에, 손익분기점이 580만이라고 하는 영화. 영화를 영화이게끔 유지시키는 사람은 누구인가. 영화의 상상력이 사람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게 만드는 시스템은 어떠해야 하는가.

그건 독서하지 않는다고 끊임없이 보도하는 매체들의 속성과도 같다. 국가별 독서량을 전제하면서, 출판사의 폐업 비율을 유독 연말연시나 경제가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줄기차게 보도하는 언론이, 책 안 읽는 국민들을 책 읽는 국민으로 바꿔 놓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이상한 것은 좋은 책은 계속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비평 역시 영화 안 보는 국민을 영화 많이 보게 만들 수는 없겠지만, 끝없이 좋은 영화를 만들게 할 수는 있다, 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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