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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스턴스

SUB+STANCE

by 별사탕

감독(각본) 코랄리 파르자

제작 코랄리 파르자 팀 베번 에릭 펠너

주연 데미 무어 마거릿 퀄리 데니스 퀘이드

촬영 벤저민 크라춘

촬영 기간 2022년 5월 ~ 2022년 10월

개봉일 2024년 12월 11일

화면비 2.39:1

상영 시간 141분 (2시간 21분 25초)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서브스턴스라는 말은 물질이라는 뜻이 변용되어 어떤 대상의 본질적 재료로써의 물질, 즉 본질(핵심, 실체)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따라서 영화 서브스턴스는, 지금 보이는 모습(STANCE) 속에 감춰진 진짜(SUB)에 대해 말하는 영화다.

이 영화가 평단에서 각광을 받는 이유는 단연, 그 충격성에 있다. 소위 BODY HORROR 장르를 개척했다는 등의 지어낸 말이 그것. 텍사스전기톱이나, 에이리언에서 보여준 기괴하고 흉측한 것의 총합이라고 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본 이 영화는 호러로 마무리함으로써 한국 독립영화 '섬.망'(박순리, 2024)의 마무리를 고독사로 처리해 버린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나와 나의 대결

에어로빅 방송을 진행하는 왕년의 스타였던 나는 퇴출될 판이다. 이유는 늙음. 단순하고 극명한 것, 이것은 치명적이다. 회복할 수 없고 돌이킬 수 없는 것, 그것은 노화다. 이후 내게 오는 것은 사람들로부터 사라지는 것, 잊혀진다는 것은 사랑의 반대말이었다. 사랑으로부터 멀어져 무관심 속에 이르러 죽게 될 운명, 죽음에 이르는 병, 절망에 빠진 '나'의 상황이다.

미지의 세계로부터 나를 하나 더 만들어 준다는 약물을 주사한 나는, 나의 등을 가르고 탄생한 젊은 '또 다른 나'를 만들어낸다. 여기서부터 이 둘의 관계는 '주의사항:둘은 하나다'라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하는 운명으로 엮인 존재가 된다. 늙은 나와 젊은 나, 둘 다 교대하며 나로 살아간다. 이렇게 둘이 역할을 교대하며 번갈아 죽음과 생존을 겪게 되는데, 이 장면의 교차가 이 영화의 백미다.


삶이란 결국, 제 살 깎아먹기

젊음과 늙음이 대결한다. 젊음은 늙음을 역겨워하고, 늙음은 젊음을 방종하다고 보지만 동경한다. 젊음이 늙음보다 한 수 위인 것은 부러워 할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이제 젊음은 늙음을 피 빨아 먹는다.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늙음에서 생명수를 얻어야 하는 것. 젊음에게 늙음의 존재 이유는 생명연장을 위해 필요한 물질, 재료를 얻어야 하는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래서 물질이 본질이 되는 것이다. STANCE(젊음의 SUE) 속에 감춰진 본질(늙음의 ELISABETH)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SUE는 ELISABETH를 역겨운 물질(SUBSTANCE)로써의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관객은 알게 된다, 젊음을 있게 한 원인(본질)이 ELISABETH라는 사실을. 영화는 여기서 끝나야 했다. 그래야 아름답다.

산다는 것은 결국 유한한 생명의 샘물을 바닥까지 퍼마시면서, 젊음이 늙음을 갉아먹으면서 방조 살해하는 것이다. 이 둘은 결국 하나이기 때문에 공멸한다는 건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란 현재가 미래를 갉아 먹는 시간 싸움이 될 수도, 미래가 현재에게 보내는 안타까운 경고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과거의 Sparcle이 만들어낸 미래가 희구하는 젊음의 현재, 그들이 만나는 공통의 시간이 죽음이라는 것을 살벌하게 대비시켜 보여준다. 인간 생에 대한 비밀을 숨겨놓은 놀라운 영화다.


BODY HORROR PICTURE SHOW

방송국장(제작자, 프로듀서) 하비, 방송국의 이사들(투자자들), 오디션 면접관, 새해 TV쇼의 방청객, 이들은 세상을 움직이는 주체들이자 욕망의 주체들이다. 이들이 가진 가치관은 '예쁘고 섹시한 여자' 진행자를 원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 '젊음'이다.

이 영화가 불편함을 주는 장면들은 모두 여기에서 분출된다. 더 이상 작동할 필요가 없는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는, 더러운 감정으로 가득찰 것이다. 굳이 그것을 풀어 쓴다면, 괴물(부작용)이 괴물(세상)에게 주는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욕를 난사하고 있다. 심지어 이 장면을 쳐다보고 있는 관객에게도 가차없이 분사된다. 1966년의 '관객모독'을 2024년의 현장에서 다시 느껴보는 심정, 물이 피로 바뀐 것일뿐. 이 얼마나 더럽고 강렬한 2024년인가.

본질(ELISABETH)에서 복제된 비본질(SUE)이 일으킨 부작용의 결과물, 괴물이다. 이 괴물은 비본질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본질이 포기할 수 없었던 씨앗이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 말이 옳겠다. 본질에 내재한 욕망의 근원(SUB)이 늙음과 젊음을 초월한 괴물을 생산해 낸 것이다.

그렇다면, 본질의 욕망은 어디서부터 오게 되었는가, 위에서 말한 욕망의 주체들에 근원한다. 나의 욕망은 그들의 욕망에 근원한다는 말, 이 부조리한 세계가 가진 가짜 욕망들, 타인의 욕망들이 나를 지배하는 것이다. 결국 나의 욕망은 너에게서 왔으니, 너에게 이것을 돌려준다는 정의의 실현, 이것을 보여주면서, 이 영화는 BODY HORROR PICTURE SHOW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만다.


영화를 보고, 이 정도의 역겹고 더러운 감정을 느끼라는 감독의 고의가 있었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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