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차의 삶, 나의 파동
흥미로운 일본 영화다. 영화가 각 민족과 사회의 특질을 반영한다고 한다면, 일본영화만큼 일본인다운 특질을 반영하는 장르는 없다. 그만큼 직관적이란 뜻이다. 한국영화를 보는 일본인들도, 한국영화 속에서 한국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어디 일본영화에만큼 미치랴. 그래서, 일본영화는 대단히 국수적이다.
사람은 다 그런 면이 있을 것이다. 뜻한 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드문 만큼. 겉과 속이 다른 것은 인간과 그를 둘러싼 사회의 구조적 특징상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볼 수 있는데, 일본인들의 경우, 그 대비가 너무 확연하다는 특징이 있다. '보여주는 나'와 '감추어진 나' 사이의 낙차가 너무나 극단적이기 때문이다. 그중 일본 사회에서 여성이 살아간다는 것은, 몇 겹의 이중 삼중의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 이 보호장치가 한순간 지배를 위한 억압 장치로 돌변하었다. 그러면서도 아무 문제 없다는 뜻으로 고요한 호수의 수면과도 같은 평정심을 유지해야 한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로 수돗물을 마시면 안 되고, 비를 맞아도 안 된다는 보도가 연일 뉴스 속보로 뜨는 현실 속에서 스도 일가는 살고 있다. 온갖 화초를 기르고 있는 정원에 물을 주다 말고 갑자기 이 집의 가장 오사무가 가출한다.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원전피해로부터 혼자 살자고 도망갔다, 여자와 바람이 나서 사라졌다는 등등의 추측이 난무하지만, 정작 오사무 자신은 여기저기 밭일을 하며 떠돌았다고 말한다.
남편이 없는 10년 동안 아내 요리코는 녹명수라는 물의 효능을 숭배하는 사이비 종교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 사이비종교 신앙의 주된 믿음은 희생과 봉사, 착하게 살면 내게 복을 준다는 별로 나쁠 게 없는 상식을 주입하는 종교다. 이것은 일본 사회의 모습과 닮아 있다. 남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극한의 일방적 상식이 지배하는 일본 사회는 내가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게 한다. 이웃집 고양이가 우리 집 정원으로 넘어온다는 말도, 상품에 흠을 잡아 반값에 달라는 진상손님에게도 속에 있는 진짜 말을 못 하며, 10년간 자신을 버린 남편에게도 자신의 진짜 감정을 속시원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 이 모든 억눌림이 일본사회를 살아내야 하는 일본인의 모습이다. 예의, 희생의 생활양식은 타인의 뒤에 나를 숨기고 살아야 한다는 수동적 인간을 양산한다. 그런 속에 여성의 삶은 말해 무엇.
아들이 데려온 6살 연상의 아가씨가 등장한다. 요리코는 아들의 태도와 삶의 양태를 보며 자신의 삶이 무시당하는 굴욕감과 좌절을 느낀다.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잘못되었다는 좌절. 아들은 자신보다 자신을 더 잘 알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아들에 대해 깊이 있게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전에, 자신의 삶과 존재가 아들로부터 깡그리 무시되었다는 좌절에 빠진다. 그것은 이미 남편에게서 받은 좌절과 같은 종류다. 가족들로부터,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무시되어 버린 것이다. 존재감이라곤 1도 없는 일본 여자의 삶, 심지어 돌아가신 시아버지에게서까지도.
동심원을 그리며 물결무늬가 퍼져나간다. 나에게서 너에게로, 다시 너에게서 나에게로, 물결과 물결은 서로 부딪치며 엇갈리며 사라진다. 요리코의 동심원은 가족들로부터 둘러싸인 외로운 섬과 같다. 고립되어 그에 따른 고통이 수반되는 외로움과 슬픔에 휩싸이지만, 그런 감정을 표출할 길이 없다.
사이비종교를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종교는 요리코로 하여금 악을 선으로 포용하고 희생하며 살라는 선한 삶을 권장한다. 앙갚음을 하면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는, 복수의 마음을 품은 자는 죽어서 무덤에 두 개의 구멍이 생기는 것과 같다는 두려움을 심어준다. 뿌린 대로 거둔다는, 인과응보의 논리다.
그러나, 세속의 교주, 마트의 청소직 여성 마사코가 등장하면서 요리코의 생활은 경쾌하게 변해간다. 소소한 복수에서부터 참았던 말을 내뱉으며 남편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요리코가 정신을 차리게 되는 계기는 고상한 일본사회나 종교에 있지 않고, 세속적 수다와 실천하는 행동이 보여주는 공격적 태도에 있다. 솔직하고, 직설적인 말과 행동 그것은 고상한 종교의 몫이 아니라, 세속의 생활이 보여주는 경험에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삶의 일회성에 대한 깨달음에서 온다. 마사코의 변화도, 요리코의 변화도 모두 한번 뿐인 내 인생에 대한 깨달음에 근거하고 있다는 데 변화의 출발을 예고한다.
요리코를 속박하고 있는 모든 관계들, 심지어 녹명회 신앙마저도, 모두 가짜라는 것을 요리코는 알고 있다. 자신을 어디에 소속시켜야 할지, 주관적 정체성을 미처 깨닫지 못한 요리코가 머물다 가는 자리일 뿐, 세상 그 어느 것도 자신의 의지만큼 소중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만들어주는 장치들이다. 한국여성에게는 그것이 오랜 한의 정서로 자리 잡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지배자의 억압과 왜곡의 결과라고 치부해버리고 극복하는 것처럼, 전체주의 집단과 사회가 요구하는 획일성의 캐치프레이즈 앞줄에는 항상 개인의 희생이 차지해 왔다. 진짜는 신명에 있다는 것을 인본인들도 알고 있는 것 같다.
요리코의 감정이 변화 발전할 때마다 플라멩코의 캐스트너츠 박자 소리가 점점 빠르고 경쾌하게 변해간다. 결국에는 감정의 정점에 이르는 플라멩코 춤을 춘다. 시아버지, 남편은 죽어 사라졌고, 아들 타쿠야 역시 큐슈로 돌아가 버리고, 혼자 남게 된 요리코, 두려운 것이 없다. 맞으면 안 된다는 비를 흠뻑 맞으며 정열의 플라멩코를 추는 요리코가 홀로 우뚝 설 수있는 환경이 타의로 만들어진 것이 희망이면 희망이 된다.
여러 갈래로 풀어 펼쳐 놓은 이야기들로 어지러운 영화다. 우화적이고 상징적인 결말이 예술적일지는 몰라도 뜬금없어 현실적이지는 못하다. 태양 아래 비가 오는 비현실적 배경은 백일몽을 연상시킨다. 영화가 현실의 문제를 풀기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대단히 성공적인 결말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알렉산더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끊어 문제를 해결했다는 식의 상징적 결말이 보여주는 문제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고 꼬투리를 잡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