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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글

목사보다 밀사(밀알같은 스승)

by 별사탕

George E. Ogle(1927-2020)은 한국 민주주의 발전사에 '큰별'과도 같은 존재다. 듀크신학대학원을 졸업하자 마자 목사안수를 받고 이제 막 휴전에 들어간 한국에 파송되었다. 대전의 호수돈 여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교목이었던 손명걸 목사가 자신의 이름으로 조지 오글의 한국이름을 '명걸'로 지으라고 제안했고, 그로부터 조지오글은 오명걸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임기를 마치고 57년에 미국에 돌아간 오글은 시카고의 루즈벨트대학교와 맥코믹신학교를 다니며 산업선교와 노사관계를 전공한다. 59년에 결혼한 그는 60년에 아내와 함께 다시 한국으로 온다. 61년 대한감리교회로부타 인천으로 파송받게 되고 거기서 전도에 필요한 사무실 겸 교회역할(인천산업전도회, 68년에 도시산업선교회로 개칭)을 할 초가집을 한 채 구입하게 되는데 그 건물이 지금의 인천 화수동 183번지에 있는 '미문의 일꾼교회'다.

산업근대화를 위한 공장이 많았던 인천의 기업들은 자연스럽게 벽안의 목사에게 시간을 내주었고, 공목으로 활동한 오글은 공장의 점심시간을 이용해 노동문제를 이야기하며 그들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했다. 이후, 공장이 주로 여성들의 열악한 노동현장이라는 걸 깨달은 오글은 동일방직에 덕적도에서 목회를 하던 조화순 목사를 파견하게 된다. 여성은 6개월 남성은 1년 공장 근무를 의무근무기간으로 정하고 현장 근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것은 대학생들이 위장취업하는 것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산업선교라는 기독교 전파의 장은 목사라는 직책을 그들과 다른 우월성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조건을 만든 것이며, 그들과 같은 자리에 설 때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평등의 마인드를 구현하고자 한 오글의 지론이었다.

또한 대학의 교육과정 속에서 이미 노동자의 삶과 산업현장에서의 종교의 역할 등을 체계적으로 배워온 그의 한국에서의 선구적 역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60년 중반 당시 범기독교적으로 일어났단 소위 해방신학운동의 신학 사상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현장에 침투해 들어간 조화순목사가 지도한 동일방직의 여성 노동조합원들의 각성이 시작되고, 그들은 스스로 노동조합 운동에 뛰어들게 되어 최초의 여성노조위원장 탄생을 초래하게 되는 역사적 사건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여성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회사와 기존 남성노조의 불법적인 행태는 경찰과 한 통속이 되어 그 유명한 ‘동일방직 똥물 사건’을 일으키게 되고 여성들의 노동운동은 핍박과 고통, 그리고 수치로 얼룩지게 된다.

이들의 운동이 한국모방, 방림, Eygnetics, Y.H. 등의 여성 노조운동의 기폭제가 되어 한국노동사와 한국민주주주의 발전사에 한 획을 긋게 되는 것이다. 70년 들어서면서 박정희의 유신독재가 본격화되어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위한 투쟁은 탄압으로 위협받게 된다. 중앙정보부(남산)에 끌려가 온갖 고문과 치욕적인 고초를 당하며 이들 노동자들은 해고투쟁을 했고, 그들의 권익을 스스로 지키려고 목숨을 건 투쟁을 했다. 그 앞 자리에 조지 오글이 있었다. 그 역시 남산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으니, 그가 받은 교육과 실천이 마련한 당연한 길이었음이 틀림없고, 이러한 일련의 고초는 그의 종교가 그를 종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그 자신 강변하고 있다.

74년 인혁당 사건이 발생한다. 박정희 정권에 의해 조작된 사건임을 간파한 그는 대중집회를 통해 그 부당함을 연설하였고 곧바로 중앙정보부는 그를 가택연금하고 당일 오후 비행기로 강제 추방해 버린다. 경찰들에게 연행되면서 뒷자리의 경찰이 '다시 돌아오게 되기를 바란다는 말, 대한항공 비행기 안에서 승무원에게서 받은 쪽지의 내용, 군중들 속에서 전해 받은 금반지 하나 등등은 한국인들이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는지에 대한 증거로 인식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새끼 손가락에 낀 금반지는 이후 오글이 한국민들에 대한 미안함과 감사의 표식이 되었다.

이런 내용들이 이 책의 1부를 이룬다. 조지오글 목사와 관련된 인물들의 증언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2부는 오글 목사의 글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게 좀 특이하다. 보통 이런 글은 자신의 경험담을 중심으로한 사실의 기술이어야 할텐데, 사실을 기반으로한 소설을 써놓은 것이다.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켜(실명을 쓴 부분도 있고, 자신이 등장하는 부분도 있어 완전한 허구는 아니다. 사실에 입각한 이야기인데, 허구를 가미한 부분이 들어가 있어, 왜 이런 형식의 글을 썼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부분이다. 아마도 과거 독재정권에 당한 이력이 있어 사실 기술에 대한 부담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해 볼 수 있지만, 그가 말년에 소설창작을 했다는 것을 안다면 일종의 버킷리스트의 완성작업으로 보아도 되지 않을까 싶다. 창작자로서의 본성이 작동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2부는 일제시대부터 근현대 한국사에 대한 기술이다. 그러면서 6, 70년대 산업화의 현장에서 자신의 소명을 실재 경험했던 일을 바탕으로 쓰고 있다. 또한 특이한 마지막 장은 탈북민에 대한 글이라는 사실이다. 전체를 아울러보면, 압제받던 일점강점기에서 부터 시작된 한국의 근대가 독재정권에 의해 개발독재로 퇴보하면서 산업화로 인한 각종 비민주적 부작용들에 대한 역사적 흐름을 꿰고 있는 것이다. 급기야 탈북민 문제에까지 봉착한 것은, 그가 얼마나 한국의 문제에 대해 깊은 인식을 하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방증이라고 확신한다. 한국에 대한 사랑이 없이는 이런 흐름의 글을 기획하고 써 낼 수 없다.


화수동에 있는 일꾼 교회가 재개발로 철거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그 건물이 없어지면 우리는, 우리를 제 몸보다 더 사랑한 조지 오글, 오명걸을 두 번 죽이는 일을 우리 손으로 자행하는 것이 될 것이며, 그러한 행위를 서슴없이 하는 우리는 후손들에게 오글과 함께 흘린 노동자들의 숭고한 피를 우리 손에 스스로 묻히는 일을 하게 된다는 것을 부끄럽게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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