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함께 살아가기

by 별사탕

인간은 왜? 죽기 싫어하는가? 나는 이 물음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어 길을 가다 말고 서서 이 글을 적고 있다.


인간은 죽음에 대해 ‘죽기 싫어하는 자, 죽는 것이 크게 두렵지 않은 자, 이것도 저것도 감각적 선택을 할 수 없는 자’로 3분할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죽기 싫어하는 자의 반대는 죽기 좋아하는 자이겠으나, 세상에 죽음을 좋아할 자는 (있긴 하겠지만) 거의 없을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말처럼 있다면, 그것은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걸고 덤빌 수 있는 용기와 관련된 것으로 이 경우는 두려움읓 무릅쓰고 목숨을 내다 버리는 것이지 목숨 버리기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세 번째 열거한 '선택할 수 없는 자'의 경우는, 죽음에 임했을 때의 자기 마음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죽음을 맞닥뜨렸을 때 본인의 분명한 선택아 결정되고, 그 선택도 앞의 두 개 중 하나일 것이니 끼워 넣을 수 없는 선택지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두 가지다. 싫어하는 자와 두렵지 않은 자.

싫어하는 자의 이유를 생각해 보자. 첫째가 죽음의 고통이다. 왜? 사고사 혹은 병사하는 경우에는 그 원인이 막대한 고통을 불러온다. 그러나, 사고를 당하지 않고 자연사한다면? 그건 우리가 짐작하는 고통과 거리가 멀 수 있다. 신체의 에너지가 고갈되고 천천히 숨이 멈춘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정신과 신체가 멈춘 것이다. 이 과정은 무척이나 자연스럽다. 어떤 경우는 평화롭고 고결하기까지 하다.

두 번째는 두렵지 않다는 것인데, 이는 사고사든 자연사든 짐작되는 고통을 극복할 수 있다는 인내에서 나온다. 이겨낸다는 강한 의지가 들어 있다. 인간의 의지로 인간의 신체적 고통을 참아낸다는 것, 이해가 된다. 충분히 훈련에 의해 그럴 수 있을 것이라 예측된다.


자 이제, 눈을 돌려서 물리적 조건의 이면을 들여다 보자. 죽음을 두렵게 만드는 것은 첫째가 고통이다. 그런데, 그것뿐일까? 사람의 불안과 공포는 무지에서 온다. 알지 못하는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 그것이 죽음의 세계다. 죽음의 세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더구나 나의 삶이 떳떳하지 못하고 죄를 많이 지었고, 더구나 못할 짓을 많이 했다면? 사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흉악범, 살인자들이 죽기 직전에 참회한다거나, 종교에 귀의한다는 것을 보면, 가볍게 볼 일이 아닌 듯싶다. 여기에는 그 스스로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의 잘못에 대해 양심적 가책,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당한 사람들에 대한 죄의식, 그리고 죽어서 받게 될 심판에 대한 두려운 상상 등이 그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신이 없다고 믿는 철천지 무신론자도, 종교 대리인을 불러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죄의식은 지은 업에 대한 인간의 타고난 방어기제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없겠지만, 있을지도 모르는 사후세계에 대한 불길한 징조를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인간이 최후 진술로 한 마디 더 보태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소위 말해 회개하면 천국에 간다는 논리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정말 솔깃한 제안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현재의 고통이든, 나중의 고통이든 모든 고통은 인간을 불안하게 한다. 그리고 알지 못하는 무지 또한 인간을 불안하게 만든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통으로부터 초월해야 하고, 무지를 지의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밤이 무서운 이유도 그렇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거나, 어슴푸레 보여서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두려움에 떠는 것이다.

모든 감각을 초월하는 것은 각각의 감각을 정확하게 아는 데서 출발한다. 예를 들어 시각은 사물의 존재를 분명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그 눈이라는 것도 바깥의 사물을 받아들이는 하나느이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눈을 감고는 사물을 보지 못하는가? 그리고 시각이 내 생각을 좌우할 수 있는가, 본 것이 안 본 것을 규정할 수 있는가 말이다. 생각해 보면, 인간이 그동안 본 것보다 안 본 것이 더 많이 지 않을까? 뭘 그리 많이 보고, 그것을 가지고 정확히 판단을 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느냐 말이다.

오히려 아무것도 안 본(혹은 못 본) 사람의 식견이 편견이 없는 순전한 생각에 가깝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가? 그래서 모든 감각은 혼돈을 일으키는 본질이다. 모든 감각을 다 끊어 낸다면 우리는 참된 지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경험론이네, 실존이네 하는 것들이 가지는 무지함이 여기에 있다.

현세적인 모든 것은 엄연한 사실의 세계라고 판단하는 것인데, 이 사실의 세계가 감각을 통해 인지 된다고 한다면, 그만큼 작은 세계를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감각의 세계 너머에 있는 세상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고, 모든 것이 그래서 하나가 되어 있는 일체의 세계다. 그 세상에서는 차별도, 구분도, 너와 나도, 남자와 여자도, 땅과 하늘도, 우주와 나도 다름이 없다. 모두가 한 가지란 말이다.


죽음은 현실계를 넘어가는 것이다. 그 뒤에 무엇이 있든 죽음을 통해 인간은 하나 되는 초월의 감각을 알게 될 것이다. 그 뒤편에 전혀 다른 세계가 있다는 말의 뜻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계와 무관한 별개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 작은 그릇을 안고 있는 큰 그릇의 존재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것은 만다라의 세계와 같은 세상이다.

너의 눈 속에 내가 있고, 나의 눈 속에 네가 있는 것처럼, 이 우주의 사물들은 서로가 서로를 비추고 있는 것으로 무한하게 확장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세상에 우리는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고통이란 것은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고, 모든 생명현상의 끝에 드리운 전환의 현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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