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에 등장하는 상수의 반대개념이 변수다. 말 그대로 값이 변하는 수다. 따라서 미지수도 변수에 해당한다. 하지만 컴퓨터에서 말하는 변수는 지정되지 않은 값, 즉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잡다한 수를 가리킨다. 지정되지 않은 값, 뭔지 알 수 없는 값. 언제든 변동 가능한 값이다. 수학에서 말하는 변수와 다를 바 없지만, 처리되는 방식이 다르다. 수학에서는 그 존재가 아름답다. 흔히 x, y, z의 알파벳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컴퓨터에서는 잡스러운 것으로 처리됨과 동시에 쓰레기통에 담겨 삭제를 기다린다.
은퇴에도 변수가 작동한다. 일시가 상수가 되어 어떻게, 누가, 무엇이라는 대명사를 만나면 변수작용이 일어난다. 예를 들면, 은퇴가 미뤄진다거나 당겨질 일은 없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예측가능하고 그날 그 시간에 반드시 일어난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에 심경의 변화, 사건 사고 이런 것들이 발생해서 은퇴를 앞당길 수 있다. 그러나 은퇴라는 사실이 늦춰지는 법은 없다. 아니 법이 바뀌면 그것도 가능한 법이다. 이렇게 일시를 당기고 늦출 수 있는 가능성은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체로 '변수'가 없다면 알고 있는 그대로 진행된다.
변수, '누가' 내게 사업을 하자고 제안한다거나, 그가 제안한 사업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나 그 사업을 '어떻게' 인수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합의의 과정을 거칠 것이다. 거기에 따라 은퇴는 앞당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변수가 작용할 수 있다는 얘기다.
변수를 처리하는 문제, 컴퓨터처럼 변수라는 정보를 처리하는 방식으로 쓰레기통방식이 있을 수 있다. 유익하지 않다거나 실현불가능하다거나, 내 삶의 가치와 맞지 않다거나 하는 변수들은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 것이다.
이런 제안이 들어왔다.
탐정사무소, 내가 탐정이고 그 사람이 운영주체가 되고 싶어 한다. 즉, 그가 내 사무실의 스폰서가 되는 것이다. 일체의 운영비를 지원하고 자신의 이름은 뒤에 숨기겠다는 의도였다. 은퇴까지 내가 회사로부터 받을 수 있는 급여의 총액은 10개월 잡고 어림잡아 세전 8천이다. 그걸 일시불로 나에게 스폰서는 지급한다. 그리고 20평짜리 쾌적한 사무실을 제공한다. 사무실은 자기 건물 3층이다. 사업자 등록은 내가 내고, 운영도 내가 한다. 조건은 단 하나, 스폰서가 의뢰하는 일을 1년에 한 개만 처리하면 된다. 물론 범죄에 연루된 일은 의뢰하지 않는다. 하는 일은 주로 사람들의 뒷조사다. 어떤 목적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스폰서의 개인적인 취미활동이라고 생각해 달라고 한다.
나는 사실 밑질 것이 없지만, 이 제안이 가진 최대의 장점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서둘러 준비할 수 있고 비용에서 내 돈이 일절 들어가지 않을 거란 얘기다. 단점은 스폰서의 의뢰를 받아야 하는 반자유인 신분에 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내가 원하는 대로 공간과 일이 꾸려지지 않을 거라는 게 최대의 단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치명적인 건, 내가 하는 일이 그에게 노출될 수 있다는 것인데, 그를 얼마나 신뢰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에 속한다. 결론은, 죽도 밥도 안 되는 일에 나를 갖다 놓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
산다는 것은 꼭 이런 식이었다. 삶은 안락과 불안의 연속이다. 내가 은퇴를 꿈꾸며 평생을 이 세계에 나를 던져버린 이유는 안락도 아니고 불안도 아닌 쪽으로 나를 건져내고자 했던 때문이었다. 안락과 불안이 가진 양면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생사의 문제와 같은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변수가 발생하지 않도록 늘 현실로부터 떨어져 초연한 자세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런 평생에 걸친 노력도 하나의 변수가 작용하면 한 번에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초심이다. 그걸 밀고 나가는 힘과 의지를 놓지 않는 것, 부족한 현실에서도 그것을 끝까지 밀고 나가 이루어 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필요했다.
변수와 상수 사이, 좋음과 나쁨 사이, 안락과 불안 사이, 항상 생은 무엇과 무엇의 사이 어디쯤에 자리하고 있다. 거기서 늘, 번빈에 휩싸였고. 갈까 말까, 잡을까 말까, 들어갈까 나갈까 이런 진퇴의 선택 중간에 서 있었다. 선택, 선택은 늘 고뇌하게 했고 회한 속에 빠져 허덕이게 만들었다. 어떤 걸 선택하더라도 그것은 불행이었다. 그리고 그 어떤 선택도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다. 나를 행복하게 만든 것은 타자가 나를 선택했을 때뿐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뿐이었다. 삶이 그랬다.
결국, 벗어난다는 것은, 선택하지 않거나, 선택의 갈림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뜻했다. 그 길에서 나가버리는 것, 그래서 번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모든 업장으로부터 놓여나게 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발버둥 치더라도 나는 나의 생명영역을 벗어날 수 없는 신세라는 것을 일치감치 깨달았던 것이다.
한바탕 남은 생을 재미로 충만해보자는 가치를 나는 실현해 보고 싶은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 그것이 나를 더 초조하게 할지라도 시간은 내편이 아니었다 할지라도, 나에게 남은 한 장의 카드마저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카드는 온전히 '내 카드'여야 한다. 그 누구를 위한 카드여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걸, 평생을 바쳐 알아오지 않았던가 말이다. 이걸 다시 반복한다면 어리석은 미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인전 하는 꼴이 되고 만다.
한번 그렇게 흘러간 시간들을 되돌릴 수는 없다 할지라도 남은 시간마저 또 그렇게 쓰라고 한다면 개 같은 내 인생으로 처절하게 생을 마감하게 될 것이다. 거리의 개처럼 마른 살을 부비며 겅중거리며 배회하는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주인을 잃어버린 개가 되어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뒷골목에서 윤간당하다가 사지가 찢겨나가 처참한 몰골로 살육될 것이다.
소름 끼치는 상상을 하며 나는, S.CHang의 자락을 꼭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