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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술이세무사 Oct 24. 2023

세무사 영업 (전단지 돌리기)

세무사의 하루

아침 9시

왁스로 잔뜩 힘을 준 머리

쫙 빼입은 정장

그리고 그 위에 영롱하게 빛나는 금빛 세무사 뱃지


거울로 보이는 삐져나온 콧털 하나를 제거하고 나면 출근 준비가 끝난다.


오전 출근길에 '전단지 돌리기' 속칭 '돌방영업'을 시작한 지 3일째

전단지 영업은 첫인상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외모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아침 10시

가게들이 오픈하는 시간에 맞춰 문밖을 나섰다.


"어서 오세요~"


이른 마수걸이 생각에 반갑게 인사를 건네던 사장님,

정장에 서류가방을 든 모습에 영업사원임을 직감한 듯 이내 표정이 차가워진다.


전단지 영업의 성공확률은 1/1000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허언이 아닌 듯 매일 50개씩 돌리고 있지만, 수확 없는 시간만 흘러만 간다.


한여름 같은 초가을 날씨

정장을 입어서인지 등줄기에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낮 12시

원룸 사무실 도착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기분을 느끼며, 에어컨을 다.



2시간 남짓 전단지를 돌리고 왔을 뿐인데..

슨 그리 어려운 일을 했다고 지쳐있는 모습을 돌아보니 나약한 자신에 대한 자책과 더불어 전단지 영업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온다.


직업의 귀천은 없다지만 명색이 '사'짜인데, '좀 더 전문가적인 영업방법'생각해보고 싶지만..

사무실 한켠 가득 쌓여있는 전단지 1,000장을 보고 있자면


"울며 겨자 먹기"


'5일은 채워보자'며 마음을 다잡았.




26살

조금은 이른 나이에 세무사 시험 합격 후 곧장 세무법인에 취업했다.


31살

5년간 열심히 일을 했지만 자부심과 성취감을 느낄 수는 없었다.

직원 신분에서 오는 한계로 인해 미래에 대한 불안감만 커져갔을 뿐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제는 내 이름을 걸고 내 일을 해야 할 순간임을 깨닫고 나서 월급의 유혹을 이겨내고 지체 없이 퇴사와 함께 개업을 결심했다.


32살

매월 수입

거래처 12개 기장료

170만 원


매월 고정비

저축성보험 30만 원(2회 미납 시 불입액의 50%가 날아가며 자동해지되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계속 불입 중)

핸드폰 요금 6만 원

기장료 CMS수수료 7만 원, 식대, 생활비 등

200만 원 이상




전단지를 돌리고 온 날은 스트레스로  밥이 넘어가지도,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의자에 앉아 자연스럽게 '리그오브레전드'클릭했다.

티어는 브론즈 3

손이 느려 포지션은 서폿

캐릭은 블리츠 아니면 알리스를 고른다.


2~3판 하고 나면 어느새 3시

무파마를 먹을까? 참깨라면을 먹을까? 고민하며

개업선물로 받은 필립스 전기포트에 물을 올렸다.




후기


저 당시를 떠올리면 '안 망한 게 용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습니다.

주택가 안쪽, 간판도 달 수 없는 원룸 2층에 사무소를 차리다 보니 로드손님은 전혀 없고

술 안 마셔, 모임 안 해, 친구 없어, 낯도 가리는 내향적인 성격이다 보니 영업능력이 zero인 상황


이전 회사에서 따라와 준 몇 개의 업체덕에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었지만 1년이 지나도록 변함없는 현실을 마주하니 그제야 등골이 오싹할 만큼 두렵고 무서웠던 기억이 납니다.

이때는 너무 어렵다 보니 점심 메뉴주문 시 500원, 1000원 차이에도 많은 고민을 했었네요.


아무튼 이제는 칼이 턱밑까지 들어왔다는 생각에 정신을 바짝 차렸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는 막막하고.. 당장 결과가 나오는 방법을 생각하니 '전단지'밖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거금 80만 원을 들여 '사무소 소개용 4페이지짜리 리플렛' 1,000장을 구입하고

6시 퇴근이지만 좀 일찍 5시에 퇴근해 퇴근길에 돌려보기로 마음을 정하였는데..

웬걸 막상 5시가 되니 '전단지를 돌리는 것'너무  8시가 넘기까지 퇴근을 할 수 었습니다;;

그렇게 며칠간 전단지는 전단지대로 못돌리고 퇴근은 퇴근대로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니 퇴근길에 돌리는 것이 문제면 차라리 아침 출근길에 돌려보기로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출근을 퇴근처럼 미뤄버리면 그때는 진짜 회사가 망해버리기에 다행히도 출근시간은 지키실 수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매일 50장씩 5일간 250장의 전단지를 돌릴 수 있었네요.

(전단지는 그냥 가게에 두고 온 것은 아니고 반드시 인사와 함께 사장님과 눈을 마주친 뒤 전달을 했습니다.)


수확이 있었는지 궁금하시다면!

1/1,000이 아닌 1/250의 확률로 한 개의 거래처를 수임했고 그 업체는 지금까지도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0.4%의 확률이긴 하나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자존감이 떨어지기도 했고

스트레스가 다른 업무에 지장을 줄 정도여서 5일을 채운뒤 더 이상 전단지는 돌리지 않았습니다.


혹자는

-시대가 어느 때인데 전단지냐

-나이트 삐끼냐

-'사'짜 달고 쪽팔리다.

이렇게 냉소적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본 사람이 아니면 그 맛을 모른다."


금전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전단지 영업을 하고 난 후에는 다시 태어났다고 할 만큼 여러 면에서 성장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어디 가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에피소드도 생겼구요.


다시 해보라고 하면 그때처럼 할 수 있을지..

이상 제게는 큰 용기가 필요했던 '전단지 돌리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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