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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술술이세무사 Oct 24. 2023

세무사 영업 (모임참석)

세무사의 하루

오늘은 아는 동생의 소개로 알게 된 '예비창업자, 창업자 모임'에 나가기로 한 날

동생은 형이 전단지 영업 실패로 낙담하고 있는 것을 알고 수소문해 모임을 알려준 것이었다.


'기특한 녀석..'


오늘만큼은 동생의 응원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이다.


왁스로 머리에 잔뜩 힘을 주고 잘 다려진 남색정장을 걸쳤다.

주머니 가득 넣은 명함과 '세무사 다이어리'를 넣은 검정가죽 서류가방까지 들고나면 준비 끝!


지하철에 몸을 싣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조금 일찍 온 탓일까? 아직 몇 사람밖에 도착하지 않은 모습.

배치된 의자수로 보아 30명~50명 정도는 참석할 예정일 듯하다.


'바로 명함을 나눠줄까?'


정장 안주머니에 있는 명함을 수차례 만지작 거리다 '조금 더 기다려보자.' 생각하며 참석자들을 살피기 위해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시작시간이 가까워지자 빈자리 없이 많은 사람들이 도착했다.

개중에 몇몇은 이미 친분이 있는 듯 친근하게 인사와 담소를 나누는 모습.

사람이 많아져 공간이 협소해지니 명함을 돌리기는 아까보다 더 어려워졌다.


'아씨.. 미리 좀 돌려둘걸' 아쉬움이 남는다.


일단 '명함 돌리기'는 보류하고 잊고 있던 주변을 살폈다.


바람막이에 청바지 차림

모자를 눌러쓰거나 수염을 잔뜩 기른 사람

맨투맨에 백팩을 멘 사람 등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대부분은 편안한 캐주얼차림으로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꾸미거나 옷차림에 신경을 썼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아뿔싸



이 자리는 예비창업자, 창업자들 간의 교류와 친목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자리로

세무'사'가 영업을 하러 오는 자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나도 창업잔데?' 라고 스스로를 합리화기엔

잔뜩 챙겨 온 명함과 빼입은 정장이 숨길 수 없는 영업사원의 모습이었다.


'옷이라도 좀 편하게 입고 나올걸..'


그것을 인지한 후부터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자리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모임장의 인사 이후 시작된 참석자들의 자기소개시간


"안녕하세요, 저는 애완견 간식 사업을 구상 중인 000입니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치약을 수입해 판매하고 있습니다."

"저는 회사원이고 퇴사를 앞두고 여러 가지 고민이 많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등등


어느 누구도 불순한 의도를 갖고 참석하지는 않아 보였다.


이윽고 나의 차례


"안녕하세요. 저는 최근에 창업한 세무사입니다. ~이하 생략~"


이후에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참석자들의 소개가 끝나고 이어진 10분간의 휴식시간

돌리지 못한 명함과 서류가방을 챙겨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머저리 같은 놈..'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후기


'뭐 저런 덜떨어진 놈이 있나?' 생각하셨을까요?

따지고 보면 저 역시 창업을 한 게 맞고,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그냥 끝날 때까지 버티다가 명함을 돌렸으면 되는 것 아니야?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당시를 돌아보면

도착해서 명함을 만지작 거릴 때부터 명함을 돌릴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고 수군거릴 것만 같다는 생각도 들었

순수함 모임에 불순한 의도로 접근한 것이 창피하고 양심이 아파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도저히 저 자리에 앉아있을 수 없던 것이구요

사실 아무도 저에게 관심이 없었을 텐데 말이죠..

'자격지심'이었나 봅니다.


돌아오는 길에는

이런 사회성으로 험난한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을까? 걱정도 되고

믿어준  동생에 대한 미안함

이것밖에 안 되는 자신에 대한 답답함으로

패배자가 된 기분이 들었네요.


그래도 여물지 못한 '순수함'이 느껴지는 옛날의 기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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