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브 쿠르베의 <플라제의 참나무>

: 고향의 품, 마음의 기둥

by 권연희


마음이 삐딱했던 청년 시절, 다이어리에 두 화가의 자화상을 품고 다녔었다. 둘 다 오만하기까지 한 자부심의 소유자인데 길을 잃은 청년의 모습이라 오히려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었다. 그중 쿠르베는 미술계의 오랜 전통과 체제에 반항하며 최초의 모더니즘 운동을 이끈 기수다. 낭만적인 자화상과 다르게 꾸밈없는 방식으로 동시대의 평범한 삶을 큰 캔버스에 담아낸 작품들, 도발적인 여성 누드화는 스캔들을 일으키며 그에게 명성과 악명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쿠르베가 진정 그리고 싶어 했던 대상은 자연이었고, 남긴 작품의 2/3 이상이 풍경화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귀스타브 쿠르베, <화가의 작업실>, 1855년, 캔버스에 유채, 361 x 598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쿠르베의 대표작이자 역사상 가장 큰 자화상인 <화가의 작업실>에서 그가 그리고 있는 것은 고향 프로슈콩테의 풍경이다. 그런데 드넓은 작업실은 이런저런 사람들로 북적이고, 벽에는 마치 상상처럼 어렴풋하게 풍경이 펼쳐져 있다. 화가 옆에는 벌거벗은 여인과 허름한 차림의 아이와 고양이가 그를 향해 있다. 그녀는 그림의 모델이나 영감의 뮤즈일 수 있지만, 화가가 추구하는 (감출 것이 없는) 진실을, 감탄하는 아이는 순수한 시선을, 고양이는 예술가의 독립성을 상징할 것이다. 쿠르베에 따르면 오른편은 친구와 지식인, 후원자 등이 상징하는 미학적인 세계를, 왼편은 고통과 가난과 부가 있고 착취와 죽음이 교차하는 정치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이들 사이에서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는 이런 사회를 중재하고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자연에 있음을 제시하고 있다.


'7년간의 예술적 도덕적 삶을 요약하는 진정한 알레고리'라는 부제가 달린 이 작품은 30대 중반의 쿠르베가 명성을 얻기 시작하던 시기에 제작되었다. 그 7년은 1848년 2월 혁명으로 설립된 공화국이 1852년 황제로 취임한 나폴레옹 3세에 의해 무너진 혼란의 시기이기도 했다. 1855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전시하고자 했던 이 작품이 6m에 이르는 크기 때문에 거부당하자, 쿠르베는 근처에 전시장을 마련하고 도록까지 만들어 개인전을 열었다. 자기애 넘치는 자화상과 함께 전시된 것은 당대 농민과 노동자의 일상을 미화나 왜곡 없이 묘사한 작품들이다. (이에 비하면 동시대 장 프랑수와 밀레가 그린 농부들은 곱고 낭만적인 모습이다.) 전시장 입구에 써 붙인 '리얼리즘관(Le pavillon du Réalisme)'은 이 운동의 시작을 알렸다.


"민중에게 진실한 회화를 제시하고 진정한 역사를 가르칠 목적으로 예술을 갱신해야만 하리라... 역사는 과거의 찬란했던 시절을 되살리는 추억이 아니라 지금-여기에 주목하는 것. 요컨대 머리가 아니라 눈으로 바라봐야만 하는 것" - 쿠르베의 리얼리즘 선언(1855) 중



귀스타브 쿠르베, <오르낭 풍경>, 1855년경, 캔버스에 유채, 73 x 92.1cm,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귀스타브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는 프랑스 동부에 스위스와 국경을 맞댄 프랑슈콩테 지역의 오르낭(Ornans)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쥐라 산맥에 위치한 오르낭은 그림처럼 루에 강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학교 미술 수업에서 꿈을 키웠던 청년은 1839년 파리로 가서 아버지가 원한 법학이 아닌 미술을 공부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특히 17세기 네덜란드와 스페인 화가들이 보통 사람들의 일상을 담아낸 장르화가 관심을 끌었다. 렘브란트의 자화상에 영감을 받은 쿠르베는 1840년대 낭만적인 캐릭터로 변장하거나 극적인 감정을 담아낸 다수의 자화상을 남겼다.


혁명과 체제 전복이 되풀이되던 시기, 쿠르베는 <화가의 작업실>에서 오른편에 등장하는 당대 지식인들과 긴밀히 교류했다. 무정부주의 철학자 프루동(1809~65)의 사회 참여 사상에 매료되었고, 미술평론가 샤를 보들레르(1821~67)와 샹플뢰리와 함께 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보들레르처럼 쿠르베는 예술이 신과 영웅, 과거나 이국의 이야기가 아닌 동시대의 삶을 다루어야 한다고 여겼다. 또한 도시가 아닌 시골의 자연, 농부와 노동자를 주제로 삼았던 지역주의자이기도 했다. 쿠르베의 '리얼리즘'은 실제처럼 보이게 하는 형식적인 기교뿐만 아니라 대상을 있는 그대로, 꾸밈없이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다. 대표적으로 <돌을 깨는 사람들>(1849)에는 남루한 노동자들의 고된 노동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었고, <오르낭의 매장>(1849)에는 시골 장례식에 참여한 누군지도 모르는 인물들의 초상이 6m가 넘는 캔버스에 담겼다. 그럴듯한 주제 없이 역사화만큼 큰 작품들은 대중과 미술계를 당황시켰다.



귀스타브 쿠르베, <숲 속의 개울>, 1862년, 캔버스에 유채, 156.8 x 114cm, 보스턴 미술관

<화가의 작업실>에서 선언한 것처럼 이후 쿠르베는 자연 풍경화에 몰두했다. 미술가들이 모여드는 퐁텐블로 숲에 가거나 클로드 모네와 노르망디에서 바다 풍경화를 그리곤 했다. 물론 쿠르베가 가장 사랑한 곳은 고향 오르낭이었다. 이곳은 '프랑슈콩테의 작은 베니스'라 불릴 정도로 아름다웠고, 주변에는 험준한 바위산과 계곡, 폭포와 동굴이 있었다. (동시대 테오도르 루소도 소년 시절 프랑슈콩테에 잠시 살면서 숲에 매료되었고, 결국 바르비종파를 이끄는 풍경화가가 된다.) 쿠르베는 재료를 실은 당나귀 제롬과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 그림 그리는 것을 즐겼다.


<숲 속의 개울>은 화창한 여름날 숲 속 개울가에 찾아온 어린 사슴들을 포착했다. 깃털처럼 부드럽게 흩날리는 나뭇잎과 수풀은 햇살에 반짝이고, 맑은 시내는 주변을 거울처럼 비춘다. 나무와 물과 동물이 어우러진 상쾌한 풍경은 눈과 마음을 정화한다. 소년 때부터 하이킹과 사냥, 낚시를 즐겼던 쿠르베는 특히 동물과 사냥 풍경을 실감 나게 묘사했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전원 풍경화에 대한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쿠르베는 더 많은 산림 풍경화를 그렸다. 시골 출신의 화가는 파리에서 프랑슈콩테 지역의 거친 풍경에 대한 깊은 애착과 자부심을 드러냈다. 초기 자화상에서 우아한 만보자(flâneur)나 첼리스트로 등장했던 쿠르베는 이제 거친 산악인이자 사냥꾼의 이미지를 구축하며 풍경화 홍보에 열을 올렸다.



귀스타브 쿠르베, <플라제의 참나무>, 1864년, 캔버스에 유채, 89 x 110cm, 쿠르베 미술관, 오르낭


40대 중반의 쿠르베는 오르낭 근처 가족 농장이 있는 플라제(Flagey)의 유명한 참나무를 그렸다. 뒤에 서 있는 나무들이 묘목으로 보일 정도로 거대한 참나무는 일곱 명이 팔로 감싸야할 만큼 두꺼운 몸통을 가졌다고 한다. 묵직한 줄기에서 뻣어나간 가지들이 풍성하게 잎을 펼쳐냈는데, 나무의 가장자리가 캔버스에 다 담기지 않아 더 웅대하게 느껴진다. 이곳은 묘사된 것처럼 개에게 쫓기는 토끼들을 볼 수 있는 장소로도 유명했다.


봄과 여름, 때론 겨울도 보냈던 플라제의 농장에서 쿠르베와 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일을 도우며 자랐다. 소작 농부가 함께 살았던 집은 빵 굽는 화덕과 기름 짜는 기계, 정원 안에 빨래방까지 있어 자급자족이 가능했고, 온갖 동물들이 사는 마구간도 있었다. 풍요로운 자연과 친밀한 가정생활을 누린 쿠르베는 고향과 자연에 대한 애착이 지대했다. 그곳에 언제나 변함없이 서 있는 참나무는 지역의 랜드마크이자 화가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모두 지켜본 터줏대감이었다. 넉넉한 그늘을 드리운 위풍당당한 참나무는 화가에게 풍성한 고향의 품처럼, 마음의 공간을 지탱하는 든든한 기둥처럼 자리했을 것이다. 몇몇 이들에게도 나무가 그러하듯이.


아쉽게도 이 나무는 백여 년 전에 벼락을 맞아 땅으로 돌아갔고, 쿠르베의 그림도 일본인 컬렉터가 소유하고 있었다. 지역의 주민들과 공공 기금 모금을 통해 <플라제의 참나무>는 2013년 오르낭에 있는 쿠르베 미술관으로 돌아왔다.



귀스타브 쿠르베, <물줄기, 라 브레메>, 1866년, 캔버스에 유채, 114 x 89cm, 티센보르미네사 미술관, 마드리드


구스타브 쿠르베, <눈>, 1868년, 캔버스에 유채, 68 x 96cm, 고대미술 국립박물관, 포르투갈 리스본


쿠르베의 풍경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생생한 색채와 실감 나는 질감 표현에 있다. 깊은 숲 속 협곡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1866)를 담아낸 풍경에서 단단한 바위와 맑고 차가운 물, 바람에 나부끼는 청아한 나무와 수풀이 만져질 듯 생생하다. 눈 덮인 숲풍경(1868)은 나무의 잿빛과 대조되는 눈부신 하양과 하늘빛의 팔레트로 묘사되었고, 겨울의 한기와 햇살의 온기를 품으며 쌓인 눈의 무게가 느껴질 정도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꼈던 풍경을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쿠르베는 다양한 제스처와 도구를 활용했다. 팔레트 나이프와 주걱으로 걸쭉한 물감을 쌓아 올리거나 긁어내며 물질성을 강조하고, 스펀지나 헝겊으로 찍어내며 깃털 같은 나뭇잎이나 흩날리는 눈을 표현했다. 그래서 고전 풍경화처럼 매끈하지 않고 거친 노동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런 기술적 연구를 발전시켜 쿠르베는 석회암 절벽이나 나부끼는 잎, 숲 속의 물줄기와 해안의 거친 파도까지 다양한 물질의 특성과 에너지를 표현할 수 있었다. 그의 풍경화는 이전의 목가적인 풍경화와 멀고, 이후 인상주의자들이 그릴 휴양지 풍경과도 분위기가 다르다. 보는 이를 화가가 있던 곳으로 데려가 자연의 물질과 향취, 활력을 생생하게 느끼게 해 준다.


"저는 회화가 매우 구체적인 예술이며, 실재하고 만질 수 있는 사물의 재현으로만 구성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쿠르베가 제자들에게 보낸 공개서한(1861)



귀스타브 쿠르베, <돌풍>, 1865년경, 캔버스에 유채, 146.7 x 240.8cm, 휴스턴 미술관


쿠르베의 풍경화 중 가장 큰 <돌풍>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파리의 대저택 보야니 공작의 방을 장식하기 위해 쿠르베는 폭풍이라는 주제를 그만의 맹렬한 터치로 완성했다. 하늘에는 파도 같은 잿빛 구름이 몰려오고, 험준한 바위로 둘러싸인 웅덩이 주변의 나무들은 돌풍에 맹렬히 맞서고 있다. 여기저기 풀들도 바람에 휘날리며 춤을 춘다. 반면 멀리 햇살에 잠긴 산맥은 잠잠하기만 하다. 폭풍우의 위력이 숲가를 덮친 풍경은 보는 이의 마음마저 동요하게 한다.


어두운 바탕에서 시작하는 쿠르베의 풍경화는 이후 인상파의 풍경과 다르게 진중하고 야생의 활기와 개성이 가득하다. 이상화된 풍경에 대한 반발심이 강했던 쿠르베는 그저 관찰한 세상을 최대한 솔직하게 표현하고자 했다. 풀과 흙냄새, 습기가 느껴질 정도의 날것 그대로의 자연, 그 풍경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진실하기에 충분히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제 인상파의 풍경화는 살짝 화장품을 덧바른 자연처럼 보이고, 세련되거나 정교한 것만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깨질지도 모른다. 보는 이가 자연을 생생하게 경험하도록 하는 쿠르베의 그림은 프랑스 풍경화의 흐름을 재정립했다. 즉각성과 생동감, 화가로서의 자기표현을 추구하는 경향은 이후 현대 회화의 문을 연 폴 세잔(1839~1906)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귀스타브 쿠르베, <고르제에 고목>, 1871년, 캔버스에 유채, 92 x 73cm, 칸톤 미술관, 스위스 로잔

친구와 음식, 여가와 여자까지, 인생을 제대로 즐기던 쿠르베의 삶에도 돌풍이 불어왔다. 1871년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혁명가들과 함께 파리 코뮌(시민과 노동자들이 수립한 자치정부)에 참여했다가 두 달 만에 진압당하며 이후 방돔 기둥 파괴를 선동한 혐의로 체포된 것이다. 자연에서 방랑하며 자유롭게 작업하던 쿠르베는 반년 동안 감옥에 갇혀 누이가 가져다준 과일이나 그릴 수 있었다.


이 시기 고향에서 그렸거나 기억을 더듬어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고르제의 고목>은 현실만큼이나 어두운 협곡의 풍경을 보여준다. 커다란 바위들이 있는 좁은 계곡에 고목하나가 뿌리를 드러낸 채 바위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얼마나 많은 폭풍을 견뎌냈을까.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밤 같은 풍경에 희미한 햇살이 나무가 뿌리내린 바위에서 반짝인다. 그간 그렸던 초록의 생기 가득한 계곡은 궂은날의 잿빛 골짜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쿠르베가 그린 <송어>(1871-2)는 낚시 바늘에 꿰인 채 피를 흘리며 눈물짓는다. 그 송어처럼 위태로운 고목은 화가와 시대의 좌절된 꿈과 비극을 드러낸다. 속박과 고뇌 속에서 쿠르베가 바라보고 표현한 자연도 변화한 것이다. 이후 정부가 엄청난 복구 비용을 청구하자, 쿠르베는 1873년 스위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곳에서도 아름답고 웅대한 풍경화를 그릴 수 있었지만,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그는 스트레스와 술병이 악화되며 몇 년 후에 생을 마감한다.




동시대에 바르비종바를 이끌었던 화가 테오도르 루소의 풍경화가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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