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괜찮은데?
나는 친구들보다 결혼을 좀 늦게 한 편이다. 대구의 보수적인 분위기가 그랬는지 몰라도 친구들은 전부 20대 중반, 늦어도 20대 후반에는 다 결혼을 했고 나는 서른이 지나서야 슬슬 해볼까라는 생각을 했으니 결혼 짬밥으로 치면 친구들에게 훨씬 밀리는 뉴비인 셈이다.
주변인들이 대부분 먼저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보니 시집살이를 간접경험할 수 있었는데 굉장히 잘 지내는 집이 있는가 하면 같이 밥 먹는 것도 질색할 정도로 사이가 틀어진 집도 있었다.
잘 지내거나 못지 내거나 시댁이 편하지 않다는 것이 중론이었고, 하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더니 ‘결혼은 괜찮지만 시댁은 좀 불편할 것 같은데? 시댁이랑 안 엮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무의식에 자리 잡았는지 결혼도 한국에 혼자 나와 사는 프랑스인과 하게 되었다. 결혼한 뒤 몇 년 간은 왕래가 거의 없다 보니 내게 시댁이 있다는 것이 실감도 안 났다. 크리스마스에 안부 전하고 선물 주고받는 온라인 펜팔 친구 같은 느낌이랄까.
그러다 프랑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어머니를 한 달새 두 번이나 만나게 되었는데, 처음은 근교에 콘서트 보러 온 김에 들르셨고, 두 번째는 바캉스 시작과 함께 우리 집에서 열흘 동안 지내시기로 했다.
처음 남편에게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는 뭐라고..? 그 이야기를 왜 휴가 일주일 전에 해주는 거야? 이러고 대판 싸웠다. 청소도 해야 되고 우리 일정도 조정해야 되는데 내가 언제 오시냐고 여러 번 물었음에도 몰라 몰라 이러더니 일주일 전에야 덜컥 일정을 공유해주는 것이 아닌가. 장담컨대 시어머니는 진즉 일정 공유를 해주셨을 테고 이 남편이라는 작자가 신경도 안 쓰다가 아차 하고 막판에 전해준 것일 테다. 남편들은 연애할 땐 자상 결혼하면 화상이라는데 이 양반은 이렇게 한 번씩 진상이 된다.
한국에서 가져온 짐을 아직도 덜 풀어서 엉망진창인 집은 남편을 채찍질해서 치우고, 그 와중에도 ‘아 청소 안 해도 우리 엄마는 괜찮아’ 이러는데.. 와.. 너네 엄마니까 괜찮지 우리 엄마도 아닌데 이런 집구석을 보여주고 싶겠냐고..
시어머니와는 시댁에서 며칠 지내본 적은 있어도 우리 집에서 며칠이나 지내는 건 처음이라 엄청 걱정했는데 막상 시댁 식구들이 도착하니 생각보다 괜찮았다. 시어머니는 엄청 활동적인 분이시라 새벽에 동네 주변에 달리기를 하러 가시기도 하고, 우리가 자는 동안 근교에 등산을 다녀오시기도 했다. 아침식사는 각자 알아서 하고 점심, 저녁은 같이 먹을 때도 있고 약속 있으면 따로 먹기도 하고 식사 준비는 내가 요리를 한 적도 있었지만 대부분 있는 걸 꺼내 먹거나 남편이 바비큐 그릴에 고기를 굽거나 해서 해결했다.
사람이 많아지니 식사에 디저트에 간식에 커피까지 주야장천 먹다 보니 설거지 거리도 엄청 많았는데 식기세척기가 있으니 손갈 일도 없었고 사실 나보다 남편이나 시어머니가 더 많이 치운 것 같다.
아침 일찍 같이 근교 구경을 갔다 와서 낮에는 다 같이 낮잠을 자고 해가 질 무렵엔 마당에 설치한 수영장에서 ‘다 같이’ 놀다가 저녁 식사를 대충 해결하고 시어머니랑 남편 욕을 좀 하면서 친목을 다진 뒤에 나는 취침하는 패턴이 이어지고 있다. 시어머니가 영어를 잘하시지만 매번 모든 대화를 영어로 통역해줄 수는 없어서 내가 알아서 편하게들 대화하라고 빠져주는 편인데 사실 이편이 나도 편해서 오랜만에 만난 모자지간 회포를 풀라고 하고 나는 방에서 쿨쿨 잠.
시어머니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눈치 없고 불어 잘 못하는 외국인 며느리라 나는 참 편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