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 너무나 많이 사랑한 죄
그런 말이 있다.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는 말. 심지어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는 노래까지 있을 정도로 아주 유명한 말이다. 뭐, 남자든 여자든,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첫사랑을 잊기는 힘들지 않을까. 이에 관련하여 우리들 사이에서 소소하게 이슈가 되었던 주제가 있다.
이 주제는 내가 만든 주제이다. 무려 이를 닦다가 생각났다. 점심 먹고 이를 닦던 와중, 혼자 머릿속으로 드라마 한 편을 썼다. 여기서 또 상상의 나래를 펼쳐야 한다.
A라는 사람이 있다. A는 고등학생 때 절절한 짝사랑을 했는데, 이게 A의 첫사랑이었다. 하지만 학년이 달라서 접점이 없었기 때문에 다가갈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짝사랑의 감정만 품고, 본인의 마음을 표현하진 않았다. 그렇게 아련한 사연을 가지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 때 몇 반이었는지 헷갈릴 정도의 세월이 흘렀다. A도 역시 새로운 사랑을 찾았다. 내 첫사랑이 생각나서 사귀게 되었지만, 지금은 이 사람 자체를 좋아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현 애인이 내 첫사랑의 혈육이었던 것이다.
어떤가. 굉장히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주제는 A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A의 현 애인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에 내 애인의 첫사랑이 내 혈육이라는 사실을 알아버렸을 때, 나의 기분, 나의 생각은 어떠할 것인가?
직장인들이 졸음과 제일 많이 싸우는 시간, 오후 3시, ‘팟칭팟’ 단톡방에서는 이 날도 어김없이 일하기 싫다며 각자 징징거리고 있었다. 너무 따분한 나머지 현씨가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찾고 있었다. 그래서 시답잖은 주제이긴 하지만, 이 닦다가 생각났다며 이 주제를 단톡방에서 꺼냈다. 나는 시답잖은 주제라고 생각했는데, 반응은 생각보다 폭발적이었다. 현씨가 먼저 답했다.
“저는 그냥 ‘DNA 대박. 그렇게 닮았나?’ 라고 생각하고 넘길 것 같아요. 하지만, A가 이 사실을 알고 나서 마음이 바뀌면 그 때부터는 문제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나는 조금 다른 생각이었다.
“그래요? 저는 좀 그럴 것 같아요. 이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당장 헤어지지 않더라도 이전과 같은 마음으로 사귀기는 힘들지 않을까 싶어요.”
“왜요?”
내 주장에 설명을 보태자면 조금 길다. 일단 나에게는 여동생이 2명 있는데, 우리집 한량(둘째, 앞으로 한량이라고 부를 예정)이랑은 전혀 안 닮았다. 대신, 막내랑 많이 닮았다. 언젠가 막내가 일하는 가게에 놀러간 적이 있었는데, 매니저님이 나를 보더니 막내에게 ‘내일 너 대신 네 언니가 출근해도 ‘가리 머리 잘랐네?’ 라고 생각할 것 같다.’고 하셨단다. 그래서 나는 이 주제에 대해서 한량보다는 6살 차이 나는 막내에게 대입해서 생각하게 되는데, 일단 6살 차이 나는 막내를 좋아했던 사람이 나랑 사귄다는 게 좀 찜찜하다. 법적으로 걸리는 것 하나 없고, 과거의 사랑은 전혀 문제될 게 없지만, 내 애인이 과거에 동생을 사랑했다는 게 나에게는 마치 애기를 사랑했다는 것처럼 들린다. 내가 막내랑 나이차이가 좀 많이 나기도 하고, 내가 첫째여서 더 그런 것 같다. 딱히 문제될 건 없으니 헤어지진 않겠지만, 중간중간에 한 번씩 생각날 것 같다. 그래서 사이가 예전 같지 않을 것 같다.
그러자 현씨는 본인은 동생이랑 안 닮아서 ‘그렇게 닮았나?’ 라는 생각이 먼저 들 것 같다고 하였다. 그 뒤로 영씨도 같은 의견이라고 말을 보탰다. 아무래도 없을 법한 주제는 아니다 보니 현실을 반영해서 생각을 하게 되나 보다. 그러다 본씨가 등장하면서 이야기가 점점 치열해졌다.
“저는 못 사귈 것 같아요.”
“왜요?”
“일단 그걸 눈치채게 만든 내 애인이 싫어질 것 같고, 그걸 눈치챈 시점부터 꺼림칙할 것 같아요. 게다가, 닮은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드라마적 요소로 따졌을 땐 좋을 것 같거든요? 근데 현실로 따져 봤을 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투영해서 사귀었을 것 같아요. 그리고 나중에 진중한 사이로 발전한다면 결혼까지 생각해야 할 텐데, 남은 평생을 같이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 때 현씨가 끼어들었다.
“그런데, 그러기엔 단순히 취향일 수도 있잖아요. 약간 취향인 연예인 얼굴 모아두면 ‘이 사람 취향 소나무네.’ 하는 느낌으로. 진짜 작정하고 첫사랑을 투영해서 ‘엇, 첫사랑이랑 비슷하네? 사귀어야지.’ 이렇게 생각한 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요.”
“저는 연예인은 연예인이고, 현실은 현실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 안 해도 될 것 같다는 편이에요. 외모가 정말 자기 취향일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군요. 저는 용납 못하는 편이에요. 그냥 ‘성격이 좀 비슷하네’ 같은 느낌은 괜찮아요. 하지만, 외모가 비슷한 사람과 사랑에 빠진다는 건 아직 그 사람을 못 잊은 것 같은 느낌이 강한 것 같아요.”
“저는 그게 더 이상한 것 같은데요. 성격이 닮았다는 건 그 사람의 특정 부분을 아직도 신경 쓰는 느낌이 들어요.”
“외모도 똑 같은 거 아니에요?”
이 이후로도 이 주제에 관한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정작 나는 물어봐 놓고 갑자기 일이 바빠지는 바람에 톡 확인을 못했다. 나중에 확인해 보니 톡이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었는데,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 같다는 의견과, 어마어마하게 신경 쓰일 것 같다는 의견이 대립되고 있었다. 이야기가 점점 고조를 향해 달리고 있을 무렵, 우리 중에서 제일 ‘상여자’인 백씨의 톡으로 우리의 대화는 종결되었다.
“가볍게 만나는 건 가능. 결혼은 안됨. 나중에 ‘사랑과 전쟁’에 나올 수 있음.”
눈을 의심하며 톡을 읽었다. 그리고는 이 톡을 읽은 모두가 현재 직장에 있어서 크게 웃을 수 없음을 한탄했다. 음소거 웃음도 한계가 있기에, 어금니가 나갈 정도로 이를 꽉 깨물고 웃음을 참았다.
이 이후로 우리는 만나서도 이 얘기를 했다. 톡으로 타자를 치는 건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만나서 대화로 해야 직성이 풀린다. 각자가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열띤 토론을 했다. 그러다 현씨가 이런 말을 했다.
“저 이거 제 친구한테도 물어 봤거든요? 제 친구가 고민하더니 자기는 싫을 것 같대요.”
세상에. 내가 무심코 꺼낸 주제를 즐길 뿐만 아니라 남에게도 공유를 하셨다니. 비록 이를 닦으면서 생각했지만 주제를 갈고 닦아 빚어낸 보람이 있었다. 아주 감개무량한 순간이었다. 사실 나도 우리 집 한량에게 이 주제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단톡방에서 반응이 폭발적이었길래, 흥미로운 주제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 한량은
“난 그냥 ‘오, 세상 진짜 좁다.’ 이 생각 할 것 같은데?”
“그래?”
“어. 아,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닮았나?’ 이 정도?”
“그래? 나는 내가 가리랑 닮았잖아. 그래서 가리 대입해서 생각해보면 좀 그럴 것 같은데?”
“아, 그래? 나 거기까진 생각 안 해봤어. 난 언니랑 가리랑 안 닮아서 그런가봐.”
물론 깊게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지만, 그래도 아주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아니라서 S들도 어느 정도 관심을 보였다. 아니, 진짜 있을 법한 이야기 아닌가. ‘드라마도 이렇게 쓰면 설정 과다로 욕 먹는다.’ 라고 하는 일들이 현실에서 파다하게 일어난다. 이 정도 설정 쯤이야,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비하면 아름다운 설정 아닐까? 어쨌든, 이 주제가 우리들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재미있는 이야기 주제로 돌아다닐 거란 생각을 하니 굉장히 뿌듯했다. 이 근래 이렇게 뿌듯하고 보람찬 순간이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정말로 첫사랑이 무덤까지 간다면 큰일 아닌가. 결국 이런 주제가 흥미로운 것도 첫사랑이 무덤까지 간다는 이 말이 아주 영향이 없다고는 못하겠다. 물론 지금이야 약간 고리타분 쪽에 속하는 말이 되긴 했지만, 이 말이 너무 오랫동안 돌아다녔다. 아마 첫사랑을 잊지 못한 사람이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사람은 또 첫사랑에 대한 환상을 가지면서 아름답게 추억을 포장할 것이다. 그러면 또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는 말을 내뱉을 것이고 또…… 이런 사이클이 반복이 되어서 지금까지 이 말이 좀비처럼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처음을 잊기는 힘들겠지만, 개인적으로 ‘첫사랑’이라는 말에 필터가 너무 많이 씌워져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게다가 나한테야 좋고 아련한 추억이지, 상대방에게는 굉장히 황당한 일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 주제에서 우리가 고려하지 못한 혈육의 입장 말이다. 이 주제에서 혈육은 졸지에 ‘내 혈육의 애인의 첫사랑’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된 것이다. 진짜 말 그대로 얼마나 황당한 일인가. 영문도 모르고 무덤까지 같이 가게 될 첫사랑의 입장도 조금은 생각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 이 말이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있고, 이제 첫사랑의 필터를 놓아줄 때가 되었다. 첫사랑의 아련한 추억을 곱씹으며 ‘그 땐 그랬는데’ 하는 것보단, 지금의 사랑에 충실하는 게 좋겠다.
* 약간 덧붙이자면 ‘팟칭팟’은 전 직장 동료들이다. 전 회사도 참 신기한 게 이런 사람들만 어떻게 잘 골라서 뽑았다. 험지에서 구르면서 생긴 전우애와 골이 따분해지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보낸 시간들로 똘똘 뭉쳤다. 처음엔 그냥 직장 동료였으나, 지금은 없으면 안 되는 사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