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N이 91프로가 나왔다.

by 김문

이제는 1절, 2절, 3절에 이어 뇌절까지 온 MBTI 검사를 최근에 다시 해 봤다. 세상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성격을 16가지로 분류해주는 MBTI는 설명하기 어렵거나 남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성향을 표면적으로 표현해주기도 하고,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방패가 되어주기도 한다. 요새는 사람을 너무 단편적으로 정의하는 것 같아 MBTI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도 내 MBTI 특징에 대해서 설명한 글을 보고 공감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기 때문에 최근에 MBTI 검사를 다시 해봤다. 이번에도 같은 MBTI가 나왔다. 다만 퍼센트가 조금 극단적으로 나왔다. 특히 N과 S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S가 한자릿수인 게 말이 되나?


나는 우리 집의 유일한 N이다. 부모님과 동생들 모두 S 성향인데 나 혼자 N이다. N의 쓸데없는 생각에 열띤 토론을 하는 것 자체를 힘들어 하는 S들 사이에서 혼자 N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건 참 외로운 일이다. S들에겐 흥미로운 주제가 아닌 걸 알기에 함구하고 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생각들이 뇌 속을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다. 내가 초능력을 갖게 되어 히어로가 된 상황, 만약 좀비 떼가 출현했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 등. 크게 쓸모 있는 생각은 아니지만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일단 재미있다.


그러다 어느 날은 집에서 MBTI 이야기를 하다가 S와 N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내가 이 집안의 유일한 N이라는 것을 상기하던 와중 막내가 이런 말을 했다.

“그럼 언니도 샤워하다가 좀비 떼한테 쫓기는 상상하니?”

정확하다. 심지어 그 상상은 질문을 받기 불과 이틀 전에 했던 상상이다. 심지어 나는 그 상상 속에서 점점 뒤쳐지는 내 친구를 붙잡고 ‘정신차려! 아직 포기하면 안돼!’ 라는 대사까지 내뱉었다. 동생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다만, 순수하게 신기하다는 눈빛이 아닌, 다소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어서 둘째가 나에게 물었다.

“언니, 그러면 복권당첨 되는 상상은 어떻게 해? 복권 당첨되면 집 사고, 차 사고 이런 상상 하잖아.”

이런 말이 있다. 복권 당첨 되면 집을 사고 차를 사겠다는 상상은 계획 설계에 가깝다고. 나는 복권 당첨이 될 경우 현재 상황에 맞춰 복권 당첨금 수령을 언제 어떻게 할 것인지를 먼저 생각한다. 일단 연차를 내기 어려운 회사이니 (학원 강사이다 보니 학원 스케줄에 맞춰야 한다.) 학원 쉬는 날에 당첨금 수령을 하러 간다. 어차피 한 달에 한 번은 쉬게 되어 있다. 그리고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서 택시를 타고…… 이 이상 얘기하면 또 쓸데 없는 상상의 나래를 구구절절 펼치게 되니 이쯤 하겠다.


그 이외에도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해 종종 생각하기도 하고, ‘로봇이 자아를 가질 수 있는가’ 같은 재미있는 토론 주제가 나오면 눈을 반짝거리기도 한다. 파우스트를 읽는 도중 ‘노인 파우스트가 메피스토를 통해 젊어질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젊어지기 직전 어린 여자를 사랑하게 된 건 옳은 일인가 아닌가’ 라는 주제를 도출해 내기도 한다. 물론 사회생활을 할 때 유용한 생각들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주제 때문에 시간을 뺏기게 된다면 그것만큼 아까운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평소 살아왔던 세상과는 다른 세계관을 경험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견해를 들으면서 새로운 관점이 생기기도 한다. 경제, 과학, 문화, 예술, 도덕 등 다양한 분야를 주제로 다양한 생각과 이야기를 하게 되면, 비록 세상 사는 데 쓸모는 없을지 언정 세상 살면서 할 수 없었던 생각을 해보는 기회를 얻게 되지 않을까. 물론 다양한 분야에 빠삭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빠삭한 지식을 알기 직전 나사가 살짝 풀린 생각들을 공유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그것만큼 행운인 게 없다. 나에게는 ‘팟칭팟’이 그렇다. 번뜩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 애니메이션에서 안경을 살짝 올리며 안경인지 안광인지 반짝 빛나는데, 거기서 ‘팟칭’ 하는 소리가 난다. 그 소리에서 따온 이름이다. 아주 번뜩 떠오르는 ‘팟칭’ 주제로 몇 시간이고 떠들어대며 식당이든 카페든 지붕을 날려버릴 정도다. 이 모임의 특징은 전부 다 N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이기 전에 ‘팟칭’ 주제를 생각해 오고, 그 주제로 열띤 토론을 한다. 누가 들으면 수준 높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이야기부터 누가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까지. 이런 이야기를 할 곳이 없어서 그 동안 참아왔다가, 만나는 순간 봉인을 해제하여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각자의 생각을 풀어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N 성향을 끌어 올려 주는 데 한 몫 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N 성향이 올라온 게 아니라, 원래 강했으나 이제껏 억눌러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아마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런 쓸모 없는 생각을 이야기 하고 싶고 쓸모 없는 생각을 좋아하지만, 쓸모가 없기 때문에 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뇌 속을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건 나 좋자고 쓰는 이야기이다. 나는 뇌 속에 있는 생각을 글로 꺼내는 행위를 하여 해소할 생각이다. 그래서 그 동안 풀지 못했던 쓸모 없는 생각을 자유롭게 풀려고 한다. 다만, 이 쓸모 없는 생각에 생각을 보태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작은 아고라가 되어, 뇌 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보는 공간이 되는 것도 좋겠다.


그래서 검사 결과는 어떻게 되었냐, N이 91프로가 나왔다. 아주 쓸모 없는 생각들이 뇌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다는 뜻이 되겠다. 쓸모는 없지만 나의 우주가 그만큼 넓다는 뜻이지 않겠나. 나의 N 성향을 극단적으로 키우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준 ‘팟칭팟’에게 영광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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