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대의 마지막 히어로

by 김문

때로, 우리는 비현실적인 상상을 한다. 갑자기 새가 되어 하늘을 나는 상상, 순간이동을 하여 출근시간 1분 전에 회사로 순간이동을 하는 상상, 어느 날 아빠가 나를 불러 ‘사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타임워프를 하는 능력이 있다’며 타임워프 발현법을 알려주는 상상 등. 어렸을 때나 ‘혹시?’ 하고 생각해봤지 이 나이 먹고서는 일어날 리 만무한 일들을 머릿속에서 재생시키곤 한다. 오늘은 그 중에서 가장 터무니 없는 이야기, 내가 히어로가 되는 상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히어로. 정말 본새나는 직책이다. 직업이라고 하기엔 약간 무리가 있다. 직업의 사전적 의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일정한 기간 동안 계속해서 종사하는 일’이라고 하는데, 일단 히어로는 돈을 받고 세상을 구하지 않는다. 물론 다른 누군가의 상상 속에서 돈을 받는 히어로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내 머릿속 히어로는 절대 돈을 받지 않는다. 그건 본새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히어로라고 하는 일은 없다. 내 스스로 히어로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히어로가 될 수 있다. 히어로라는 수식어는 내가 붙이는 게 아니고 남이 붙여주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저는 히어로입니다.’ 얼마나 없어 보이는 행동인가.


히어로의 조건은 ‘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히어로가 될 수 없다. 출동하기 싫어 죽겠든, 출동하고 싶어서 미치겠든, 나를 위해서가 아닌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 출동한다는 것 자체가 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다는 증거이다. 세상 사람들이 ‘와! 역시 최고에요! 오늘도 정말 고마워요!’ 라고 한다면 그만큼 보람찬 일이 없겠지만, 만약에 세상이 몰라준다면 나 혼자 쓸쓸한 사투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이 생각의 꼬리를 물고 탄생한 주제는 ‘만약 내가 이 시대의 마지막 히어로라면’이다.


이 시대의 마지막 히어로. 내가 했던 터무니 없는 상상들 중 가장 슬픈 상상이다. 상상은 ‘만약 이 세상에서 나 혼자 히어로라면’ 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세상 그 누구도 내가 히어로라는 걸 몰라주는 것이다. 세상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고 이대로 가다간 멸망의 길을 걷게 될 건데, 사람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다. 이 사실을 나 혼자 알고 세상을 구한다. 하지만, 세상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 방향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사람들 입장에서는 내가 악당인 것이다. 이 때, 나는 세상을 구할 수 있을 것이며 세상을 구하긴 할 것인가. 아마 정말 외롭고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나보고 악당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안 그래도 세상을 구하기 위해 싸우고 일해야 하는데, 나를 악당 취급하는 세상과도 싸워야 하고, 나 자신과도 싸워야 한다. 이 얼마나 외롭고 모순적인 일인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세상과 싸운다, 이게 말이 되냐 이 말이다.


아마 내가 이런 상황이라면 나는 수많은 생각 속에 갇히게 될 것 같다. 나 혼자서 세상을 구할 수 있을까? 세상이 알아주긴 할까? 나 빼고 세상 사람들 모두 내가 악당이라고 하는데, 정말 내가 틀린 걸까? 내가 틀린 거면 어떡하지? 지금 세상이 멸망하고 있는걸 아무도 모른다고? 혼자서 세상을 구하다가도 나 자신을 의심하는 생각은 불쑥불쑥 찾아와서 내 일을 방해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히어로라지만 나도 사람이다. 내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내 판단을 옳다고 굳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누구도 지지하지 않는다. 누군가 나에게 돌을 던져도, 죄 없는 자만 돌을 던지라고 하신 예수님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여전히 하늘을 날며 세상을 구한다. 정말 외롭고 외로운 길이다. 차라리 눈감고 나도 저들이랑 같은 길을 걸을까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하지만, 저들은 몰라도 나는 안다. 이미 알아버린 상황에서 모른 척 멸망을 지켜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시, 이 외로운 길을 혼자 걷는다.


최근에 현씨와 본씨에게 이 주제를 꺼냈던 적이 있다.

“들어봐요. 이 세상이 나 빼고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어? 지금인데?”

“이걸 나 혼자만 알고 있어요.”

“어? 지금인데?”

‘어? 지금인데?’를 두 번 반복하고 나서야 대화가 시작됐다. 내가 이 주제를 꺼내자, 현씨가 물었다.

“그러면, 나 말고 내 가족들, 내 친구들도 다 저를 악당이라고 생각하는 거에요?”

“음……네. 저를 사랑하긴 하지만 제가 틀렸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쟤가 원래 안 저랬는데 왜 갑자기 저렇게 됐을까?’라고 생각하며 안쓰러워 하는 상황이에요.”

“아, 그래요? 그래도 저는 세상을 구할 것 같은데요?”

전부 같은 의견이었다. 이미 알아버린 이상 어쩔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세상을 다 구하고 나면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춰 은둔할 것이라는 의견까지 일치하였다. 이유는 ‘피곤할 것 같아서’ 였다. 알고 보니 내가 히어로였다는 걸 알든 모르든, 세상의 반응은 볼 만큼 봤고 사람들도 질리도록 봐서 너무 피곤하니 그냥 아무도 없는 곳에서 쉬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아무래도 주제가 히어로이다 보니까 히어로에 관련된 영화 이야기로 이야기가 넘어갔다. 그 와중에 아주 흥미로운 의견이 나왔다.

“그런데 히어로와 빌런은 한 끝 차이래요.”

“오, 왜요?”

“히어로도 세상을 구하기 위해 빌런과 싸우다가 건물을 부수고, 빌런도 본인의 신념을 위해서 싸우니까요. 애니메이션에서 봤는데, 히어로가 세상을 구하다가 실수로 아이를 한 명 죽여요. 그런데, 사람들이 히어로가 아이를 죽였다는 이유로 비난을 해서 결국 그 히어로가 자괴감에 빠지게 돼요. 이제까지 세상을 위해서 열심히 싸웠는데, 아홉 개를 잘해도 하나를 잘못하면 질타를 받는 게 히어로인거죠.”

정말 흥미로운 관점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면 히어로와 빌런은 정말 한 끝 차이인 것 같다. 물론 세계정복 같이 자기 사리사욕을 채우는 빌런도 있지만, 요즘 빌런은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지랄하는 경우가 많다. 가끔은 그런 생각도 든다. 빌런이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범죄자를 죽이고 인구의 절반을 줄이는 등의 행동을 하는 게, 우리가 한 번쯤 생각해 본 일이 아닌가. 인터넷을 보면서 범죄자가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나올 때 우리는 ‘저런 범죄자 누가 죽여줬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 일을 실제로 빌런이 실행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빌런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기를 신고했다는 이유로 피해자에게 보복하려는 범죄자를 죽이는 빌런과 그 빌런을 막으려는 히어로. 피해자 입장에선 이 둘 중 누가 진짜 빌런이고 히어로일까. 이렇게 생각하니 정말 빌런과 히어로는 한 끝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우리의 결론은 무엇이냐, ‘히어로를 하느니 차라리 빌런을 하자’ 였다. 어차피 히어로와 빌런은 한 끝 차이이고, 내가 아홉 개 잘 해도 하나 잘못해서 질타를 받을 바에는, 빌런이 되는 길을 택하는 게 낫겠다는 것이었다. 빌런은 아홉 개를 잘못해도 하나를 잘 하면 사람이 달리 보이기 때문에 더 쉽다는 의견이었다. 그렇지. 생각해보면 남들의 의견, 남들의 평가가 뭐 그리 중요한가 싶다. 이 글을 쓰다가 문득 남들과 본인을 비교하면서 자신감이 떨어진 수강생이 생각났다. 그 수강생에게 내가 했던 말이 있다.

“저는 모르는 사람의 평가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물론, 이 수업을 들으면서 친해지는 수강생도 있겠지만, 이 수업이 끝나면 전부 타인이 돼요. 저도 이 수업이 끝나면 OO씨에게 타인이 되겠죠. 그러니 남들 평가 너무 신경 쓰지 마시고 본인에게 집중하세요.”

그런 생각이 든다. 내가 혼자서라도 세상을 구하겠다는 결심이 설 정도면, 그만큼 확실하게 해야 하는 일이라고.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내가 세상을 구해야 하는 일이 생긴다면, 차라리 히어로보다는 빌런이 되는 게 좋겠다. 뭐, 내가 굳이 빌런을 하겠다고 얘기 안 해도 그들에게는 이미 빌런이 되어 있겠지만 말이다.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특출난 사명감이 아닌 그저 켕기는 게 싫어서 세상을 구하는 빌런이 되겠다 이 말이다. 아니다. 그냥 히어로고 빌런이고 너무 무겁고 피곤하고 거창하다. 그냥 아무것도 안 할래.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조용히 세상을 구하겠다. 이게 내가 세상을 사랑하는 방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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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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