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식 좀 할 수도 있지
나는 편식이 아주 심하다.
일일이 나열하기도 민망할 정도지만 몇 가지 추려서 이야기해 보자면 파, 마늘, 양파를 특히 싫어해 진한 한식요리는 잘 못 먹고, 맵고 짠 것에 약해 국물요리는 건더기만 건져먹는다.
고기는 가리는 게 없는데 야채는 조리법에 따라 편차가 크다. 샐러드나 구운 야채는 괜찮지만 나물은 별로다.
계란은 써니사이드업과 스크램블만 먹고 냉면 위에 올려진 삶은 계란은 안 먹는다.
조합도 중요하다. 가령 베이컨은 좋아하나 샐러드나 피자 위에 뿌려진 건 싫어하는 식이다.
짜장, 커피, 초콜릿은 아예 먹지 않는다.
고수, 곱창, 우니, 산낙지, 양고기 등 호불호가 강한 음식은 은근히 잘 먹지만 음식점의 기본 밑반찬은 손도 안대는 경우가 많다.
처지가 이렇다 보니 처음 보는 사람과의 어색한 식사자리에서는 한의사라고 밝히는 게 꺼려진다.
(지금 당신도 당황했을 거라 생각한다.)
한의사는 으레 골고루 건강하게 챙겨 먹을 것으로 오해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직업이 노출되면 상대는 식사가 나오기 전부터 한바탕 '마늘을 좋아한다', '이거 몸에 좋은 거냐', '요즘 뭘 달여먹고 있다', '식후엔 꼭 이걸 먹는다' 등등 본인의 바른 식습관에 대해 어필하다가 내가 밥 먹는 꼬라지를 보고 굉장히 놀란다(실망이 다소 섞인).
한의사씩이나 되어서 마흔 먹도록 편식을 고치지 못한 것은 몰라서도 아니고 성질이 못되거나 까탈스러워서도 아니다. 단지 예민한 혀를 갖고 타고났기 때문이다.
보통 소음인에게서 많이 보이는 이 예민함은 소화기가 약한 신체적 특징과 맞물려 증폭되는데, 본인도 모르게 자신에게 맞는 음식만을 선별하려는 일종의 방어기제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는 편식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보는 사람은 불편할지 몰라도 내 속은 편안하다.
부족한 건 한약이 도와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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