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상은 내 물건이 아닌 것들로 종종 채워질 때가 있다. 포장지로 감싸인 것도 있고, 검은 비닐봉지에 꽁꽁 묶여 가려진 것도 있다. 때론 제철을 느낄 수 있는 각가지 반찬과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는 도시락도 있다.
모두 제자샘들의 마음이 담긴 선물들이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나도록 선물을 주고 가신 분을 알 수 없는 것도 있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냥 주고 가신 선물이기 때문이다. 또는 내가 없을 때 메모 한 장을 써 놓고 조용히 다녀가시는 분들도 있다.
난 이런 선물을 받을 때마다 버릇처럼 혼잣말을 한다.
“무조건적인 나눔의 마음이 배가가 되어 반드시 돌아가길 바래봅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주는 행위 안에는 어느 정도 받을 것을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받을 것을 계산하지 않는 나눔을 많이 보았고, 또 내가 그 나눔을 받는 대상이 되어 보기도 했다.
조건이 없는 나눔이란 이처럼 받을 것을 계산하지 않는 나눔이다. 주는 행위에서 온전한 기쁨을 만끽할 뿐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나눔이 내 삶에도 자리 잡을 수 있을지 고민해 보았다. 나눔의 장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실제로 나눔의 장점을 누리며 사는 사람도 별로 없다.
행동은 생각과 마음보다 우위에 있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슴에서 손과 발로 가는 것이 인생을 살며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멀고 먼 거리라고 했다. 텔레비전이나 SNS, 길거리에서 도움의 손길을 요구하는 구호단체들이 홍보를 해도 실제적으로 도와주는 사람들은 한정적이다.
그 한정은 경제적 여유가 많은 사람들이 아니다. 무조건적인 나눔을 해봤던 사람이다. 머리에서 가슴으로 , 가슴에서 손과 발로 가는 여정을 한 번이라도 걸어봤던 사람인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여정을 걸어보며 느꼈던 감정들과 경험들이 또다시를 불러온 것이다. 나도 그런 경험이 있다. 고등학생이 된 큰딸이 5살 생일이 되던 해부터 아프리카 1:1 후원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두 명의 자녀를 더 낳아 세 자녀의 엄마가 되었고, 아프리카 후원 아이들 역시 3명이 되었다.
나는 그로 인해 6명의 자녀를 둔 다자녀 엄마다. 그 어떤 후원보다 아프리카 1:! 후원은 신중히 결정할 수밖에 없다. 사정이 생겨 후원 중단이 되면 아이들은 또 다른 후원자를 만나기까지 긴 시간이 필요하게 되고 이어오던 삶의 많은 부분에서 어려움이 찾아든다.
이런 점을 알고 있었기에 다른 후원보다 조금은 더 신경을 쓰고 있다. 내가 세 아이들에게 모두 같은 나이의 아프리카 친구들을 만들어 줄 수 있었던 계기는 큰 아이의 후원으로 알게 된 값진 경험 덕분이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처음으로 상장을 받아온 적이 있다. 후원 단체에서 편지 쓰기 대회를 진행하고 있었고 그 대회에서 받게 된 상장이다. 당시 도내에서 내 딸만이 장려상을 받았다. 그런데 글 솜씨가 유달리 뛰어난 것이 아니었다.
후원단체에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추측하건대 후원자 이름과 동일해서 상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조건 없이 시작했던 나눔이 가져다준 보상이다. 상장을 받은 것보다 더 큰 보상은 큰 아이가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초등학생이 되어 첫 상장을 받고 아주 많이 기뻐했다. 이 상장을 계기로 큰 아이는 많은 대회를 나가게 되었고, 도전이라는 문턱을 넘는 데 있어 망설임과 큰 싸움을 하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고등학생이 된 지금도 많은 과제들을 거침없이 도전하며 살아간다.
조건 없는 나눔은 나의 생각보다 더 큰 크기와 모양으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둘째와 셋째는 어떤 삶의 지혜를 알게 될지 그저 기대가 된다. 그때는 나의 생각으로 짐작할 수 없다. 그러나 큰 아이처럼 반드시 무언가를 깨닫게 되는 시점이 올 거라는 확신은 있다.
이 경험으로 나도 주는 자의 입장에 서게 될 때 조건 없이 주려는 마음을 되새긴다. 상대방에게 받았음을 확인하지 않고, 받은 것에 대한 만족여부를 확인하지 않는다. 때론 나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주고 오기도 한다.
그저 주는 행위에서 느껴지는 만족감이 그 순간 채워지면 그것으로 만족한다. 받을 것을 계산하면 그만큼의 한계가 정해지지만 계산하지 않는 순간 한계가 없는 사랑이 되어 돌아온다.
조건이 없는 나눔은 이처럼 격한 한 번의 경험이 필요하다. 그 경험이 습관이 되면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나를 데려다 주기 때문이다.
“습관이 무섭다.”라는 말을 많이 들으며 자라왔다. 고치지 못하고 자리 잡는 나쁜 습관을 일컬어 말할 때 쓰는 문장이다. 그러나 습관 역시 한쪽에서만 바라보는 편향적인 사고방식을 내려놓아야 한다.
“습관이 행복이다.” 이런 말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좋은 습관이 자리 잡는 어느 날부터 그동안 만나보지 못했던 행복의 여정에 올라탈 것이다. 그 후는 상상에 맡기려 한다. 각자의 여정길이 다르니 모두 같은 것을 느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