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포항시 우현동
“안녕하세요? 새로 이사 와서 인사드려요.”
엄마와 나, 동생은 조심스레 옆집 문을 두드렸다. 옆집 아주머니는 반갑게 떡을 받으셨다. 아주머니의 등 너머로 궁금함이 가득 찬 두 얼굴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한 명은 머리를 질끈 동여 묶은 여자아이였고 또 다른 한 명은 새하얀 얼굴에 눈이 매우 큰 남자아이였다. 아주머니는 그들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니들 이리 나온나. 옆 집에 친구 이사 왔다 안카나, 서로 인사해라.”
지원이 언니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고 경원이는 나랑 동갑이었다.
“서로 친하게 지내래이.”
나와 동생은 매일 같이 옆집 문을 두드렸다.
“언니야 놀자!”
“잠깐만 있어보래이.”
지원이 언니는 경원이와 함께 훌라후프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훌라후프 안에서 팔을 꼬아 코를 잡고 허리를 숙여 코끼리 모양을 만들었다.
“오십 번 돈 다음에 비틀거리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거래이. 훌라후프 바깥으로 나오면 탈락이데이. 하나, 둘….”
삼십 번쯤 돌기 시작했을 때 머리가 팽팽 도는 것 같았다. 끝까지 오십 번을 마저 채우고 자리에 벌떡 일어섰다. 세상이 뱅글뱅글 돌았다. 다리가 저절로 움직이고 신기하게도 아파트가 기울어 보인다고 생각한 순간, 딱딱한 무언가가 뺨에 닿았다. 아파트는 완전히 가로로 누워있었다.
“니 괘안나?”
지원이 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니야. 너무 어지럽데이.”
“어지러우면 바로 주저앉아야 한데이. 니 크게 다칠뻔 했데이! 인나서 얼른 반대로 돌아라.”
나는 지원이 언니가 너무 좋았다. 언니는 어쩜 이렇게도 아는 게 많을까. 지원이 언니가 시키는 대로 뱅글뱅글 돌았다.
“언니야! 이제 뒤죽박죽으로 어지럽데이!”
한바탕 소동 이후, 우리는 얌전하게 훌라후프를 돌렸다. 허리로 돌리는 건 초보들이나 하는 것. 엉덩이, 허벅지, 종아리 정도 돌려야 중수 정도 되는 것이고, 목이나 한 팔로만 돌려야 진정한 고수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모두 고수가 되기 위해 쉬지 않고 훌라후프를 돌려댔다.
“니 훌라후프로 부메랑 할 줄 아나?”
목덜미를 주무르며 경원이가 말했다. 경원이는 훌라후프를 세로로 세우더니 땅으로 튕기며 굴렸다. 훌라후프는 통통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다가 다시 거꾸로 돌아왔다. 경원이는 씨익 웃으며 우리를 돌아봤다.
“봤나?”
“우와! 니 뭔데? 어떻게 한 건데?”
“훌라후프를 몸 쪽으로 땡기면서 굴리면 된다. 내 하는 거 잘 보래이.”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경원이를 따라서 훌라후프를 연신 굴려댔다.
아무리 굴리고 굴려도 훌라후프는 돌아오기는커녕 자꾸만 넘어졌다. 뜻대로 되지 않아 성이 난 마음을 담아, 있는 힘껏 훌라후프를 내동댕이 쳤다. 훌라후프는 데굴데굴 굴러갔다. 차가 몇 대 없는 주차장을 지나 내리막길로 굴러가더니 추진력을 얻었는지 잘도 굴러갔다. 넘어지지도 않고 데굴데굴, 정문을 지나 데굴데굴, 차도까지 데굴데굴 굴러갔을 때 덜컥 겁이 났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붙잡아야 하나? 차가 오면 어쩌지?’
온갖 걱정이 내 머리를 휩쓰는 순간,
“끼이이익!”
요란한 경적 소리와 함께 훌라후프는 차에 부딪혀 넘어졌다. 갑자기 튀어나온 훌라후프에 놀랐는지 차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다시 출발했다.
아파트 앞에 펼쳐진 넓은 도로에는 신호등 없이 횡단보도만 있었다. 어른들은 혹시라도 사고가 날까 봐 “어른 없이 니들끼리 절대 건너지 마래이!”라며 으름장을 놓곤 했다. 훌라후프는 도로 한가운데에 남겨져 계속해서 차에 밟혔다. 밟힐 때마다 부서지기도 튀어 오르기도 하며 운전자를 놀라게 했다. 우리 넷은 발을 동동거리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거 저리 놔둘끼고? 우리가 가져오자!”
경원이가 말했다. 우리들은 그 말 한마디에 어른이라도 된 듯 힘이 솟았다. 좌우를 살피고 저 멀리까지 차가 없는 걸 확인했다. 잽싸게 도로로 달려들어 훌라후프를 집어 들었다. 숨을 고르고 뒤를 돌아보니 커다란 도로 너머에 우리 집이 보였다.
4차선 도로를 건넌 우리는 한껏 어깨가 솟아올랐다. 우리가 건너온 쪽은 넓게 들이 펼쳐져 있었다. 방금의 용기와 무모함과 두근거림을 뒤섞어 서로를 칭찬하며 들판을 누볐다. 훌라후프 조각을 손에 쥐고 풀들을 쏴쏴 가르며 결연한 표정으로 나아가는 우리,,, 누가 옆에서 봤다면 호랑이라도 잡아올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지원이 언니는 바닥에 떨어진 페트병을 줍더니 메뚜기를 잡자고 했다.
“내 하는 거 잘 보래이.”
언니는 한 손에 페트병을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 메뚜기를 잡았다. 잡은 메뚜기를 페트병의 좁은 입구로 차곡차곡 밀어 넣었다.
“언니야 억수로 잘한다!”
“니 봤나? 이래 하면 된데이.”
황금색 들판이 노을로 물들 때까지 메뚜기를 한가득 잡았다. 연한 홍시가 퍼지는 것 같은 하늘과 내 손을 스치는 들판의 풀, 좋아하는 친구들이 곁에 있던 그 순간, 이 세계가 이대로 저물어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도로를 건너는 일은 더 이상 예전만큼 무섭지 않았다. 내가 실수하거나 부족해도 나를 채워줄 친구가 곁에 있었기 때문일까.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던 도로는 어느새 한눈에 들어올 만큼 작아져 있었다. 페트병 가득 생포한 메뚜기를 집으로 가져가 당당히 엄마에게 내밀었다. 우리의 모험담을 듣던 엄마의 눈빛은 불안과 감탄 사이를 바쁘게 오르내렸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옆집 문을 두드렸다.
“니 경원이한테 고맙다고 하래이.”
엄마의 말에 쭈뼛쭈뼛 주저하다가 말을 건넸다.
“고맙데이.”
“고맙데이가 뭐꼬! 고마워,라고 해야제.”
엄마는 내 사투리를 지적했다. 같이 사투리 쓰는 사이에 무슨 상관이람.
“고마워.”
순간 서울 말투를 흉내 내는 게 부끄러웠는지, 경원이에게 건넨 마음이 부끄러웠는지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그날 저녁 식탁에는 ‘메뚜기볶음’이 올라왔다. 메뚜기볶음은 부끄러움 한 스푼과 용기 한 스푼이 담긴 고소하고도 달큰한 맛이었다.
집에 있는 사이를 풍요롭게 하는 방법
- 이웃과 친한 친구 되기
- 함께 자라며 살며 용기 얻기 (작은 모험과 추억은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요.)
- 고마운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기
+ 이웃과 친구가 되면 집에 있는 모든 것이 놀이가 됩니다.
메뚜기도 잡아먹을 수 있는 엄청난 힘이 생겨요. (바퀴벌레는 먹지 맙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