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18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

서울특별시 홍제동

by 좋아해 Feb 06. 2025

  전라남도 장흥군에서 평생 나고 자란 아빠는 경상북도 포항시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단칸방이던 신혼집에서 첫 번째 딸인 나를 얻었고 이층 집에 세 들어 사는 동안 둘째 아들을 얻었다. 친구도 가족도 아무런 연고도 없는 그곳에서 지인을 만들고 가족을 꾸려가며 자리를 잡았다.


  아빠는 항상 부지런히 움직였다. 평일에는 아빠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또렷이 기억나는 건 아빠의 다정함이다. 출근 준비로 바쁜 아침에도 우리가 자는 방에 찾아와 나와 동생의 발을 꾹꾹 주물러 주곤 했다.

  “키 큰다 키 큰다 키 큰다. 키 커라 키 커라 키 커라.”

  같은 말을 리듬감 있게 중얼거리며 발바닥과 발목을 조물조물 스트레칭시켜주곤 했다. 나는 그 손길이 한없이 좋아서 진작 잠에서 깨어났지만, 계속 자는 척 연기하기도 했다. 그러면 아빠는 “우리 딸 입가에 미소가 생기는 걸 보니, 깼는가?”라고 물었고 나는 애써 웃음을 참고 입꼬리를 내리며 버티다가 결국엔 “파하하! 아빠 더 해줘.”라고 웃으며 일어나곤 했다.


  아빠는 출근하지 않는 날엔 더 바삐 움직였다. 집안의 망가진 것들을 끊임없이 고치고 새롭게 수리했다. 한 번은 키가 작은 우리가 쓰기에 세면대가 너무 높다고 생각하셨는지 세면대를 없애고 긴 호스를 연결했다. 호스 밑에 바가지 두 개를 내려놓더니 직접 시범을 보이며 설명했다.

  “반절만 물을 받아서 머리를 퐁당 담가. 그렇지 잘하네. 머리가 물에 젖으면 샴푸를 동전 크기만큼 짜. 어디 봐. 맞아, 그렇게 하는 거야. 샴푸를 머리에 골고루 바르고 손톱을 세워서 긁어야지. 귀 뒤쪽도 그래그래. 거품이 충분히 나면 바가지에 물을 세 번 받아서 헹구고 그래도 미끈거리면 한 번 더 받아서 깨끗하게 헹궈.”

  ‘머리 감기’라는 두 단어에 담긴 복잡다단한 과정을 우리가 받아들이기 쉽도록 차근차근 가르쳐주곤 했다. 처음 배우는 어린이의 눈높이에 맞게 구체적인 사물과 횟수를 강조하며 설명하는 기술은 깔끔하고 정갈했다. 엄마는 아빠가 우리를 가르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한 마디씩 거들곤 했다.

  “저리 잘 가르치는 거 보면 느이 아빠는 선생 해야 했는데.”

  아빠는 엄마의 말이 싫지는 않았는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대학교 다닐 돈이 어디 있어서 선생을 한당가.”

  사실 선생은 먼저 생을 살아가며 배움을 전달하는 모든 사람이 아닐까 싶다. 아빠는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수많은 다정을 전달했고 그 다정이 쌓이고 쌓여 우리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잠옷 개는 법’ ‘이불 개는 법’ ‘수건 개는 법’ 3종 세트를 터득한 어린이가 되었다.


  여러 번 이사를 거듭하다 우리 집을 마련한 지 이 년쯤 되어가던 어느 날,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저녁 늦게 퇴근하던 아빠가 집에 있었다. 그것도 평일 낮에. 아빠는 베란다에서 담배를 태우기도 하고, 거실 바닥에 등을 돌린 채 누워있기도 했다. 마치 축 늘어진 러닝셔츠처럼 집에 늘어져 있었다. 나는 아빠가 집에 있는 게 마냥 좋아서 누워 있는 아빠에게 안기며 말했다.

  “아빠야, 아빠야가 집에 있으니까 억수로 좋다.”

  “그러냐.”

  아빠는 슬며시 미소를 지었지만 전혀 기뻐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 말을 덧붙였다.

  “아빠야가 계속 집에 있으면 좋겠다.”

  “…… 이제 회사 가서 돈 벌어야지. 그래야 너희들 키우지.”

  아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베란다로 향했다. 담배 연기가 물에 떨어진 잉크처럼 까맣게 번져나갔다.


  회사의 부도로 인해 아빠는 일자리를 잃었다. 어른이라는 건, 내 탓이 아닌 일들로 벌어지는 수많은 불행을 견디어 나가는 것일까. 회사의 부도는 아빠가 아무리 애를 쓴다고 해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은 아빠는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는 일에서도 거듭 실패했다.


  서울에 살던 작은 아빠는 일자리가 많은 서울로 이사할 것을 권유했다. 마침 지인의 직장에 일자리가 났다며 빨리 올라오라고 했다. 우리 가족은 그 기회를 놓칠까 봐 서둘러 이사를 준비하였고 7년간 일구었던 포항에서의 삶이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동네 친구들, 일손을 돕던 주말농장, 길 건너 메뚜기 밭, 젓가락에 휘휘 감아 먹던 과메기까지.

  “니 내년에 국민학교 들어간다꼬 노트마다 ‘포항국민학교’라고 죄다 써놨는데 어쩐데이? 니는 여그 남으래이. 우리 경원이랑 같이 학교 가야재이.”

  이웃들은 우리의 이사 소식에 아쉬워했지만, 아빠가 새 일자리를 구한 건 정말 잘된 일이라며 축하해 주셨다. 서울 살면 바다 맛이 그리울 거라며 이삿짐에 말린 굴비며 김을 보태주기도 하셨다.


  이삿날은 하늘이 꾸무룩 거리고 날씨가 흐렸다. 트럭에 쌓인 이삿짐을 심란하게 바라보던 엄마는 비가 올 것 같으니 덮개를 덮어달라고 요청했다.

  “에이, 이런 날씨엔 흐리기만 하고 비 안 와요. 그냥 갑시다.”

  이삿짐센터 아저씨의 예감은 불행히도 틀렸고 결국 우리는 고속도로에 차를 세우고 부랴부랴 덮개를 씌웠다.

  “아이고 가구 다 상하네!”

  엄마는 자기 말을 안 들어준 아저씨에게 원망을 터트렸다.

  “이사할 때 비 오면 부자 된다잖아요. 부자 되시려고 비가 오네.”

  아저씨는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비 오면 부자 된다.’라는 말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여러 번의 이사를 겪어낼 때마다 작은 위안이 되었다. 날이 좋으면 날이 좋아 다행이었고 비가 오면 부자가 될 거니까, 눈이 오면 더 부자가 될 거니까. 알 수 없는 내일의 날씨처럼 이사 이후의 미래에 괜히 기대를 걸어보곤 했다.


  서울에서의 생활은 IMF 사태가 겹치면서 자꾸 꼬여갔다. 아빠는 새 직장에 출근하는 시간보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더 길어졌다. 나중에는 매일매일 집에 있기만 했다. 다정하고 부지런했던 아빠는 날이 갈수록 선인장처럼 변해갔다. 날카롭게 가시를 세우고 가만히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점이라면 선인장은 꼿꼿이 서 있었지만, 아빠는 누워있었고 가시가 스스로를 향하고 있었다.

  “다시 포항으로 내려갑시다. 여기 있어 봐야 뭐하요.”

  보다 못한 엄마가 말했다.


  조용하지만 소란했던 긴긴밤이 여러 날 지난 뒤, 우리 가족은 전라북도 익산으로의 이사를 준비했다. 1997년이었다.


  아빠는 엄마와 함께 익산에서 통닭 장사를 시작했다. 직접 닭을 튀기고 양념을 만들고 배달을 나갔다. 장사는 변수가 많은 일이었지만 몸을 쓰고 움직여 돈을 번다는 사실은 아빠를 다시 일어나게 했다. 새벽 장사를 마치고 나면 가끔 남은 닭을 튀겨 와 엄마와 술 한잔을 하기도 했다. 나랑 동생은 방금까지 보던 티브이를 후다닥 끄고 자는 척을 하고 있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통닭이라니! 이제는 ‘자는 척’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우연히 깨어난 척’을 해야 했다.

  “아, 목이 말라서 잠이 깨버렸네.”

  눈을 비비며 혼신의 연기를 다해 방문을 열고 나오면, 내 뒤를 따라 동생도 쪼르르 따라 나오곤 했다. 아빠는 기다렸다는 듯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목마르다면서 어째 눈은 통닭만 보고 있네?”

 어느새 우리 손엔 닭다리가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아빠는 회사원이었다가 통닭집 사장님이 되었다가 기술학교 학생이었다가 지금은 다른 직업을 이어가고 있다. 겁이 많은 나로서는 변화가 두렵고 선택이 무섭다. 아빠 역시 그랬을까. 수없이 많은 선택과 결정이 버겁고 그 결과를 받아들이는 일에서 도망치고 싶었을까. 내 뜻대로 굴러가지 않는 상황에 마음이 뾰족해질 때면 그때의 아빠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아주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집에 있는 사이를 풍요롭게 하는 방법      


- 가족을 발 마사지로 깨워주기

- 용기 내서 아빠에게 팔짱 끼기 (꽉 안아주는 것도 좋아요.)

- 때로는 속이고 속아주기


+ 한 번씩 늦은 밤 치킨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추천합니다. (닭다리도 슬쩍 건네보세요. )

이전 05화  훌라후프 구출 작전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