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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마스크보다 더 무서운 건

전북 익산시 모현동

by 좋아해 Feb 13. 2025

  어릴 적 살던 동네는 기찻길이 가까이 보이는 곳이었다. 철길을 건너기 위해 커다란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그 밑으로 기차가 자주 지나가곤 했다. 저 멀리 기차가 보이면 온 힘을 다해 기차를 향해 달려갔다. 지나가는 기차의 꼬리를 밟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숨을 가득 몰아쉬며 기차를 향해 달려가는 건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기차의 쿵쿵거리는 소음에 마음이 벅차올랐고 순식간에 내 발밑으로 사라지는 모습에 괜히 설레기도 했다. 사실 좋은 일은, 그 순간 이미 만들어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차의 꼬리가 멀리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면 함께 달려온 친구도 옆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꼭대기 층이었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엘리베이터가 없는 꼭대기 층에 산다는 건 형편이 넉넉지 않다는 뜻이다. 번듯한 집은 생각보다 많은 돈이 필요하고, 여유가 없다면 매일매일 작은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한다. 언젠가 한 번 ‘빨간 마스크’라는 괴담이 학교에 퍼져나갔다. 빨간 마스크는 우리집까지 잘도 따라왔다. 밝은 창문에서 어두운 계단으로 돌아설 때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빨간 마스크가 찢어진 입을 벌린 채 “너도 입을 찢어줄까?”라며 얼굴을 들이밀었기 때문이다. 계단을 오를때마다 상상속 빨간 마스크와 치열하게 싸워야 했고 6층까지 올라가는 시간은 너무도 길었다. 한동안 나는 집에 올라가지 못한 채 1층에서 엄마를 목 놓아 불러댔다.  

  “귀신이 어디있다고 그래. 그냥 올라와.”

  “창문에 빨간 마스크가 앉아 있을 것 같아서 너무너무 무섭단 말이야. 1층이나 2층으로 이사하면 안 돼?”

  엄마는 말을 꾹 삼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계단을 오르는 건 무서웠지만 내려가는 건 괜찮았다. 내려가는 계단의 끝에는 항상 나를 기다려주던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갱이 있었다.  


  갱은 내 첫 번째 친구이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첫 번째 친구를 사귀었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친구’라는 단어로 가장 옛날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면 역시 갱이 떠오른다. 처음 갱과 만났을 때, 그 애의 표정까지 명확하게 기억난다. 갱을 만나기 전의 다른 친구들은 지문이 잔뜩 묻은 렌즈처럼 희뿌옇다. 그 렌즈를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걸 보면 내 첫 번째 친구는 확실히 갱이다.  


  2학년 봄, 서울에서 익산으로 전학 온 나는 알 수 없는 패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익산에 도착해서 이삿짐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던 부모님은 나와 동생을 놀이터로 내보내셨다. 놀이터에는 아이들이 바글바글했는데 하나같이 피부가 까무잡잡했다. 그보다 더 충격적이었던 건.  

  “뭐여어어어!”

  “근디이이이! 어쩌라고!”

  화가 난 듯 길게 늘여가며 말하는 그들의 사투리였다(불과 몇 년 전에 ‘고맙데이!’ ‘니 뭐꼬!’를 외치고 다녔으면서, 서울 물 조금 먹었다고 어깨에 뽕이 들어갔다). 오갈 데를 못 찾고 당황하는 내게 그 애가 눈을 맞춰왔다. 키가 크고 노란 블라우스를 입은 생그러운 아이였다.  

  “몇 학년이야? 오늘 이사 왔어? 우리랑 같이 놀자.”

  동글동글 갸름한 얼굴에 보조개가 방글 올라왔다. 노란 블라우스와 그 애의 까만 얼굴이 되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갱이었다.  

  “너 우리 반으로 전학 오면 좋겠다. 내가 잘 챙겨줄게.”  

  보조개를 머금으며 싱긋 웃던 갱은 마치 언니 같았다.


  챙겨준다는 그 애의 말은 진짜였다. 우린 같은 반이 아니어도 함께 등.하교하는 사이가 됐다. 집 근처에서 서로를 기다리다 학교에 갔고 각자의 반이 끝날 때까지 복도에서 기다리다 집으로 갔다. 친구라는 건 서로를 기다려주는 사이를 말하는 게 아닐까.  


  한번은 학교에서 소풍을 갔다. 야트막한 언덕 밑에 물길이 흐르고 있었는데 시멘트 길이었던 걸로 보아 농수로 시설이었던 것 같다. 자유시간이었는지 아이들은 하나, 둘 물길로 내려가서 물장난을 쳤다. 갈아입을 옷이 없어 주저하던 갱과 나도 결국엔 내려가서 신나게 놀았는데 문제는 다시 올라오는 일이었다. 수로의 시멘트 벽이 꽤 높았기 때문이다.  

  “다 놀았으니 이제 집에 가자.”  

  선생님은 우리를 불러 모았다. 몇몇 아이들은 잽싸게 올라가 선생님께 달려갔지만, 대다수 아이들은 높은 수로에 매달려 올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키가 크고 운동 신경이 좋았던 갱은 먼저 올라가 우리를 차근차근 끌어 올려주었다.

 

  “늦었다. 빨리 와라!”  

  선생님의 재촉하는 소리에 우리는 마음이 다급해졌다.  

  “갱, 나도 올려줘.”  

  “나 먼저야!”

  제일 친한 친구인 나를 두고 다른 아이들부터 올려주는 갱이 야속해서 흘깃 째려보다가 삼일 정도는 삐져있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갱은 자기보다 훨씬 무거워 보이는 친구를 끙끙거리며 끌어올다. 그 아이가 올라온 순간, 반동으로 인해 갱이 넘어졌고 하필이면 그곳에 철근이 쌓여있었다. 갱의 발등은 철근에 걸려 깊고 길게 찢겨버렸다.  


  순식간에 갱의 발등을 피로 물들었다.  

  “갱, 괜찮아?”  

  고통을 끅끅 참으며 갱은 울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난리가 났다. 선생님께서 달려와 갱을 들쳐업었고 주위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파상풍 걸리는 거 아냐?”

  “저거 엄청 녹슬었잖아.”

  “갱 어떡하냐. 엄청 피 많이 나던데.”

  학교로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은 갱에 대해 수근거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나 혼자였다. 기찻길 위 다리를 건너는데 저 멀리 기차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기차 앞머리부터 뒤에 꼬리까지 계속 밟고 있으면 소원이 더 잘 이루어질지도 몰라.’

  숨이 차도록 달려 기차를 밟고 섰다.  

  ‘갱은 괜찮을까.’  

  빨리 올라오라고 재촉하던 선생님도 미웠고 스스로 올라오지 못한 아이들도 미웠다. 갱에게 자기부터 올려달라고 채근했던 우리가 미웠고 갱에게 고맙다는 이야기 대신, 삐져있겠다고 마음먹었던 내가 미웠다. 기차는 커다란 바람을 일으키며 다리 밑을 빠르게 지나갔고 나는 갱이 괜찮기만을 바라고 또 바랐다. 우리 집에 도착해 계단을 오르고 오르는 동안 빨간 마스크 따윈 전혀 무섭지 않았다. 갱이 잘못되는 게 더 무서운 일이었다.  


  다행히도 갱은 며칠 뒤 학교에 다시 등교했다. 우리는 전처럼 서로를 기다리며 함께했고 다투고 싸우고 삐지고 질투하고 미워하기도 했다. 서로의 부족한 모습을 내보이면서도 함께했던 건 결국 좋아하는 마음 때문이지 않을까. 작년 여름 갱은 부푼 배를 안고 나를 만나러 왔다. 샌들 속 갱의 발등엔 그때의 흉터가 길게 남아있었다.

  “갱, 너 발등에 상처 왜 생겼는지 기억나?”  

  “소풍 갔다가 철근 같은 거에 찔렸을걸? 근데 왜?”  

  “있잖아.”  

  갱은 내 이야기를 가만가만 듣더니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눈을 맞춰왔다.  

  “괜찮아. 지금은 하나도 안 아파.”

  보조개를 머금으며 갱은 싱긋 웃었다.  

  

  어릴 적 우리 살던 집이 재개발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엄마는 “그 아파트를 사놨어야 해.”라며 탄식했다. 나는 빨간 마스크와 기찻길과 갱이 떠올랐다. 거기에 쌓여있는 우리 이야기가 재개발과 함께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지금은 기찻길 위 다리를 건널 때 애써 달리지 않는다. 기차의 꼬리칸을 밟기 위해 정신없이 지금을 달려가지 않아도 되는 걸 알고 있다. 다가오지 않은 막연한 미래를 준비하는 것도 어렵지만, 최선을 다해 지금을 살아가는 것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뒤를 자꾸 돌아보는 건 어떤 의미일까. 후회일까. 그리움일까. 어쩌면 그 사이를 오가며 지금을 다져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집에 있는 사이를 풍요롭게 하는 방법  


- 나를 기다려주는 누군가를 떠올리기

- 안부를 묻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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