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손가락을 두 번 베였다.
처음은 베이글이었고 두 번째는 마카다미아였다.
냉동실에서 딱딱하게 언 베이글을 반절로 가르고 싶었다. 동그란 모양이 두 개가 생기도록. 빵을 세웠고 빵칼로 가운데를 가를 생각이었다. 빵칼을 톱질하듯 밀어내자 쓱쓱 잘도 잘렸다. 공기의 온도가 닿지 않은 빵의 가운데 쪽으로 들어가자 칼이 멈췄다. 베이글의 동그란 구멍에 왼손을 밀어 넣고 힘을 주어 다시 썰었다. 칼은 다시 나아갔고 곧이어 받침대 역할을 하던 내 손가락도 밀고 나갔다. 핏방울이 방울방울 맺히는 손가락을 보고 번쩍 정신이 들었다. 흐르는 물에 손가락을 씻었다.
‘무딘 빵칼로도 손이 베일 수 있구나.’
말랑거리고 폭신한 빵을 자르는 칼이어서였을까. 나는 빵칼을 전혀 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것들을 가르는 안전한 칼이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나약하다고도 여겼다. 누군가와 갈등이 생겨 다퉈야 할 때면, 아무것도 찌르지도 베어내지도 못하는 무르디 무른 빵칼을 쥐고 싸우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날카롭게 잘 벼린 다른 이의 칼날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나는 맨날 진다며, 상대를 탓하기도, 잽싸게 피해자의 위치를 선점하기도 했다. 하지만 빵칼도 칼은 칼이었다. 예리하게 잘못된 부위를 도려내는 다른 칼과 달리, 주변을 뭉그러뜨리며 파고드는 칼이었다. 때때로 나는 상대를 거칠게 짓누르며 뭉뚝하게 어그러진 상처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빵칼로 다친 손가락들이 거의 아물어갈 때쯤, 또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정확하게는 내가 벤 거다). 이번엔 마카다미아, 단단한 껍질 속에 하얀 알맹이를 품고 있는 마카다미아였다. 껍질이 벗겨진 마카다미아는 공기에 장시간 노출되어 푸석푸석 겉도는 맛이 있었다. 껍질에서 막 벗겨낸 마카다미아는 약간의 미끄러움과 촉촉함을 가지고 있어 훨씬 고소하고 맛있다. 껍질을 까는 수고로움에 비하면 열 배쯤 더 맛있으니, 기꺼이 까야지.
마카다미아 껍질에는 가느다란 금이 있다(이 금은 도대체 어떻게 생기는 건지 궁금하여 찾아봤더니 인간이 기계를 이용하여 틈을 만들어 파는 것이었다. 마카다미아의 껍질은 너무 단단해서 자연에서는 그 어떤 동물도 깨 먹을 수 없다고 한다. 씨앗이 발아하기 위해서는 산불이 나야 할 정도라니, 말 다했다). 가느다란 틈에 함께 동봉된 작은 철판을 밀어 넣고 나사를 돌리듯 돌리면 반절로 똑! 까진다. 문제는 이 작은 철판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 밤, 나는 기어코 마카다미아가 먹고 싶었고, 먹어야 했다. 주변을 둘러보다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으니 바로 칼. 칼날을 틈에 밀어 넣고 칼 손잡이를 회전시키면 비슷한 원리로 깔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은 적중하여 한 개를 성공했고 입 안의 고소함을 느끼며 두 개째 시도했다. 입 안이 즐거워서였을까. 한 번의 성공으로 자신감이 생겨서였을까. 빨리 먹고 싶은 조바심 때문이었을까. 두 번째 마카다미아는 금방 열리지 않았다. 손에 힘을 주어 칼날을 돌리는데 동그란 마카다미아가 미끄러져 튕겨나갔다. 갈 곳을 잃은 칼날은 그대로 왼손가락을 파고들었다.
소리 없이 아픔을 삼키며(밤이었고 이 바보 같은 짓을 들키지 않고 싶었기 때문에) 반대손으로 왼손가락을 눌러 잡았다. 두근두근, 손가락은 지금 자기가 여기 있다는 걸 온몸으로 외치는 것처럼 쿵쾅 거렸다. 때때로 나는 내 능력을 과대평가한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자존심은 또 엄청 세서 지고 싶지도 않다. 질 것 같은 싸움에는 재빨리 백기를 드는데 내 밑천을 들키는 것보다 도망치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카다미아한테는 이길 것 같았는데 오히려 당했다. 스스로의 한계를 무시하고 밀어붙인 결과이다.
이제 선택은 두 가지.
껍질이 벗겨진 마카다미아만 사 먹거나, 다른 방법으로 껍질을 벗기거나.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껍질을 깨야할지도 모른다. 내가 쥔 칼은 여전히 빵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딘 칼도 여전히 칼이고 껍질 속 알맹이는 벗겨내야만 맛볼 수 있다.
그래서 마카다미아는 어떻게 되었나?
새로운 도구를 찾았다.
칼날만큼 빠르고 효율적이진 않지만 천천히 시간만 들이면 껍질이 반절로 똑! 까진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내게 맞는 방법으로 하나하나씩 껍질을 벗기면 되는 것 아닐까. (애초에 마카다미아 껍질 까는 도구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쉿!)